선택받은 사람
토마스 만 지음, 김현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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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의 후기 작품으로 대개 <파우스트 박사>, <요셉과 그 형제들>, <선택받은 사람> 그리고 마지막 미완성 유고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이렇게 네 작품을 꼽는다. 모두 좋은 품질로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다행히 읽어볼 행운을 얻은 바, <파우스트 박사>에서는 예술가의 본질을 밝히려 애썼고, <요셉과 그 형제들>과 <선택받은 사람>에선 야곱, 요셉의 이야기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추출한 내용의 기독교 내외적 해석을 꾀했으며,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미완성으로 끝나 딱히 특정할 수 없지만 근엄하게만 생각해왔던 토마스 만이 이런 코미디도 썼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던 적이 있다. 사실 만의 후기 세 작품은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와 더불어 작품 속에 은근하게 배어 있는 토마스 만 특유의 ‘점잖은 유머’가 의미심장해 책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즐거움인지는 직접 읽어보셔야 알겠지만.

  이 책 <선택받은 사람>을 열면, “종소리, 도시의 하늘에, 온 도시 위에 여운에 가득 찬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도와 같은 종소리!”라는 영탄문으로 시작하는데, 이 거대한 종소리는 이제 아일랜드 출신의 베네딕트회 사제 신분인 클레멘스가 성 갈렌 수도원에서 카롤링거 왕조 때의 학자이자 시인인 노트커의 책상에 앞에 앉아 이야기의 정령이 자신의 입과 글을 통해 소설을 시작함을 알리는 일종의 경종 소리이다. 그리고 클레멘스는 아래와 같은 짧은 시를 소개하면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어느 군주가 있었다네. 이름은 그리말트

  실신하여 쓰러졌도다.

  분명 두 아이를 남겼으나

  아, 그들은 한 쌍의 죄인이 되었도다!


  플랑드르와 아르투아, 그러니까 지금 지명으로 네덜란드와 프랑스 북부 지역을 다스리는 공국에 군주인 ‘그리말트’가 있었으니, 카스타리엔 산의 구름 같은 말 구베요르스 위에서 장검 에케작스를 들고 벨라페르 성 위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위풍당당하고 어진 심성으로 이름을 떨친 바가 작지 않았으나 세상에 모든 것이 행복한 사람은 애초에 없는 법. 이 군주에게는 자신의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것이 단 한 가지 근심거리였다. 대공부인 바두헤나가 벌써 마흔이 넘어 이제 희망을 포기해야 할 처지였던 터이지만, 저 동방에 사는 심학규의 처 곽씨부인도 마흔이 넘어 치성을 드린 끝에 심청을 나은 본보기가 있어서, 쾰른, 우트레히트, 마스트리히트, 휘티히 등의 대주교들로 하여금 대미사를 집전하게 했더니 그 효험이 있었던지 아홉 달 만에 아들 빌리기스와 딸 지빌라를 한꺼번에 얻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신이 벤치마킹한 곽씨부인처럼 바두헤나 대공부인 역시 아들 딸 쌍둥이를 낳고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이들은 당연히 매우 귀하게 자랐지만 일곱 살에 똑같이 마마에 걸려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너무 심하게 긁는 바람에 이마 한가운데, 딱 같은 자리에 초승달 모양의 옴폭한 구멍 같은 흉터를 지니게 되었다. 이들은 여덟 살, 열 살이 되도록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다녔고 침실을 함께 사용하며 언제나 어린 상태로 남고 싶어 했으니 그래야 평생 자신들이 같은 방을 쓸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도 점점 자라, 이제 빌리기스는 호리호리한 상앗빛 몸에 비해 너무도 커서 야만인 같은 하체를 가지게 된 것을 유모들과 하녀들이 감탄하며 수군대기 시작했고, 이때마다 여동생 지빌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갖고 싶어. 이 소꿉친구는 내 거야. 그에게 수작 부리는 여자들은 눈을 뽑아버릴 거야. 낸 대공의 딸이니까 그래도 벌을 받지 않을 거야.”

  이들의 아버지이자 홀아비인 그리말트 대공은 아들보다 딸을 더 사랑했다. 자연스레 될 수 있는 한 오래 딸을 곁에 두고자 하는 욕심은, 에스카발론의 왕이 정중한 편지를 통해 지빌라에게 청혼한 것을 거절하는 것으로 시작해, 안쇼우베의 늙은 왕이 아들 샤피오르를 위한 청혼을 비롯, 이포탕트의 쉬오라르스 백작, 가스코뉴의 공작 오발로, 발라이스 군주 플리호플리헤리, 헤네가우와 하스펜가우의 지배자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청혼을 모두 물리쳐, 결과적으로 구혼자들로 하여금 불쾌한 증오심의 필터를 통해 플랑드르와 아르투아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들이 열일곱 번째 생일을 불과 며칠 남겨놓지 않은 어느 날, 위풍당당하지만 인자한 군주 그리말트 대공이 정수리에 중풍을 맞아, 어의들로 하여금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이제 유언을 준비하라는 진단을 내리게 한다. 군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대신들과 친척들을 모두 모아놓은 그리말트 대공은 왼쪽 입술 한쪽만으로 아들 빌리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고, 빌리기스에게는 자신이 지빌라의 혼인을 과하게 미루어 지빌라의 장래를 망치기도 했고, 여러 나라 궁정으로 하여금 그리말트 가문에 앙심을 품게 했으니 빠른 시일 안으로 알맞은 배필을 찾아주라고 당부하고, 며칠 후 어의들의 진단대로 두 번째 중풍에 강타당하여 숨을 거두고 만다.

  이제 그리말트 대공은 이퍼른 사원의, 17년 전에 아내가 안장된 아내 곁에서 영원한 잠에 들게 된 날. 여전히 남매는 같은 방을 썼으나 이젠 둘 사이에 궁에서 키우는 덩치 큰 개 하네기프가 그들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인 듯 엎드려 자고 있었는데, 악마 발란테가 사악한 권고에 따라, 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괜히 악마 탓을 하는지는 몰라도, 빌리기스는 소름끼치는 악한 쾌락의 도구가 되어 쾌락을 자신들의 것으로 오인한 채 개 하네기프를 넘어 지빌라의 침상에 오른다. 그리하여 이제 남매가 아니라 여자와 남자로서 동침하려 할 때, 충실한 개 하네기프가 달을 올려다보며 비탄의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고, 이에 이미 검술을 익힌 빌리기스는 침상에서 내려와 단검으로 하네기프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피 묻은 손으로 동생의 침대를 다시 올라 남매의 첫 번째 쾌락을 몰고 온다. 쾌락, 그리고 잠깐 후, 남매이자 지아비, 지어미가 된 이들의 귓가에 악마 발란테의 속삭임은 계속 이어진다. ‘이제 일은 저질러졌다. 너희들은 그 짓을 한 번 더 해도 좋고, 몇 번이고 해도 좋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이, 언제나 쾌락을 동반하지만 그 끝은 결코 아름답지 않으니 이들 앞에도 치명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점은 누구든지 짐작할 수 있을 터. 과연 어떻게 이야기가 풀려갈까.

  여기까지 써 놓으면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은 대개 이런 스토리려니,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이제 도입부가 끝났을 뿐. 지금부터 <선택받은 사람>의 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직 ‘선택받은 사람’은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토마스 만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소설 역시 금지된 영역의 해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이란 보다 기독교적 고민의 결과물이란 귀띔 내지 힌트만 드리겠다. 지금 소개한 내용이 A4 용지, 폰트 10으로 한 장하고 열다섯 줄가량 되지만, 마음먹고 늘려 쓰면 열 장도 가능하다. 이야깃거리도 그만큼 충분하다. 이게 다 토마스 만의 무시무시한 입담 때문이다. <요셉과 그 형제들> 독후감에서도 같은 말을 했듯이 어떤 디테일 하나도 그대로 지나가지 못하는 전형적 독일 작가의 꼼꼼함이 가히 놀랄 만한데, 이 책에선, 비록 위의 요약 스토리에선 그걸 살리지 못했으나, 곳곳에서 ‘점잖은’ 웃음거리를 포함하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언제나 독자들에게 꼼꼼한 독서와 집중을 원하고 있다.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것, 그걸 한자어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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