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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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오랫동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최인훈의 연작소설인 줄 알았다. 나중에야 박태원이 갑술해인 1934년에 쓴 중편소설이며, 최인훈이 이를 1969년부터 72년까지의 서울을 무대로 리메이크 했다는 얘기를 듣고 기함을 했다. 지나보면 슬픈 추억이다. 어찌 박태원이란 소설가가 우리나라 근대 문학사에 있었다는 걸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배우질 못했을까. 그 많은 선생들은 가르쳐주질 못했을까. 물론 박태원이란 소설가가 있다는 얘길 들을 다음에도 수십 년이 흐른 올해 초여름에야 겨우 <천변풍경>을 읽게 됐고, 그만 박태원 만의 작풍이 마음에 들어 중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도 꼭 읽고야 말겠다고 작심을 해 드디어 읽었다. 중단편집 한 권을 읽고 별 다섯 개로 평점을 준다면, 책 속의 거의 모든 작품이 내 마음에 들어야 다섯 개가 나오는 법이니 대단히 어려운 일이어서, 거의 만점과 다름없는 네 개를 주고자 한다. 이중에 가히 백미는 역시, 표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다른 작품에 관해서도 할 얘기는 많은데, 워낙 <소설가 구보....>가 눈에 띄어 이 중편 한 작품에 대하여만 독후감을 쓰려 한다. 구보 씨의 가족은 늙은 어머니와 형수, 구보 이렇게 세 명, 그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조카. 구보는 귀에 중이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열병을 앓은 이후 눈eyes에 확실히 문제가 있는 소설가. 소설을 써서 팔아 생계에 보태야 하는 소위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원고도 잘 써지지가 않고, 써봤자 흔쾌히 글을 사려는 출판사, 잡지사, 신문사도 별로 없다. 하는 일은 오전 열한 시나 일어나 오정 때쯤에 외출을 해 밤늦게 귀가해 해가 밝아오도록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이런 가족이 <소설가 구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출현한다. 다만 시간이 변함에 따라 가족의 형편이 나빴다가 조금씩 좋아져 제일 마지막 작품 <재운>에 이르면 월 3백 원 이상의 원고료 수입으로 행랑채에 군식구까지 거닐고 살 정도가 된다.
  이 작품에선 구보가 어머니의 “일쯔거니 들어오거라.”는 당부의 말씀에 크게 대답하지 않고 오정에 집을 나서 다음날 새로 두 시까지의 약 열네 시간에 걸친 구보 씨의 하루 행적을 쫓고 있다. 구보 씨의 집은 <천변풍경>의 무대인 광교 부근. 종로로 나가 일단 동대문 방향의 전차에 탑승을 하고,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잡생각을 하다 문득 낯익은 여성을 발견한다. 작년 여름에 선을 본 여성으로 마음에 있었지만 저쪽에서 자신을 과연 합당하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고심하다가 그만 하릴없이 시간만 흘려 혼담을 놓친 아까운 상대였다. 여성은 동대문에서 내리고 구보는 다시 종로 네거리로 돌아와 이때부터 새벽 두 시까지 종로통과 광교까지를 무대로 온갖 벗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당연히 전편에 걸쳐 일관된 주제의 스토리도 없고 그저 벗들, 그들과의 친밀함과는 상관없이 인연이 있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또는 미리 전화를 해 약속을 하고, 아니면 불문곡직 직접 찾아가 만나는 벗들과 얽힌 이야기, 단편fragment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구보가 스쳐지나가거나 거리를 특정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을 보면, (경성제국)대학병원, 조선은행, 경성역 대합실, 종로경찰서, 도청, 체신국, 광화문통, 조선호텔, 경성우편국, 종각, 낙원정, 광교 등이니 비록 열네 시간 동안에 걸치긴 했지만 여러 곳을 주로 걸어서 다녔다면 가뜩이나 체력이 좋지 않은 구보 씨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하루 일과 가운데 퇴근 시간 가까울 때니까 오후 여섯 시 가량해서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일하는 관계로 하루에도 세 번씩 경찰서, 도청 등을 들락거리며 살인강도와 방화범들에 관한 기사를 써야 하는 시인 동무를 만나 차 한 잔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인 동무가 열심히 구보 씨에게 <율리시즈>를 논하는 동안 구보 씨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진즉에 이 작품이 <율리시즈>를 축약해놓은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인 것이 박태원이 <율리시즈>를 읽고, 그것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소설가 구보....>를 썼을지도 모른다 싶은 생각이 이미 꽉 박혀 있는 상태에서, 시인 동무가 <율리시즈>를 논하기에 이른다. 디덜러스가 하루 온 종일, 다음날 아침까지 헤매고 다닌 더블린 시내를 축약하면 구보 씨가 쏘다닌 종로-경성역-광교 부근일 수도 있겠다는 거. 구보 씨도 이 도심벨트를 따라 온갖 종류의 벗들과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나 자신의 연애 이야기부터 사랑, 행복, 돈, 문학, 불평등 등에 관해 다방면으로 비연관적인 사색을 하게 된다.
  소설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박태원의 대표적인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한 번 읽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 다른 이도 아니고 우리 현대문학사의 큰 별인 최인훈마저 이 작품을 패러디했을 정도였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쓴 모더니스트가 코뮤니즘을 선택해 북쪽으로 갔을까, 내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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