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스터 렌 - 어느 신사의 낭만적 모험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김경숙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싱클레어 루이스의 작품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렇게 두 권만 읽었으니 결코 그에 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처지렸다. 게다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두 작품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같은 작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상이한 작품이라 좀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던 바, 이번에 <...미스터 렌>을 읽고서야, 역시 싱클레어 루이스는 20세기 초반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는 모습이 훨씬 어울린다고 결론을 냈다. 그렇게 결론을 내버렸다. 실제로 루이스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많은 미국 독자들이 서슴없이 <배빗>을 꼽는다고 한다.
  전에 제임스 A. 미치너의 역작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토론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 작가 네 명으로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를 꼽은 반면, 반드시 평가절하 되어야 할 작가 네 명의 명단으로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을 나열한 적이 있다. 위대한 소설 작가 명단엔 그리 크게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 가운데 (당시까지만 해도 읽어본 책이라곤 <배빗> 하나밖에 없었음에도) 루이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어, 오히려 나로 하여금 이후 그의 작품이 눈에 띄는 대로 읽어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그렇지 뭐여? 스타인벡을 이 명단에 포함시킨 거엔 거의 분노를 했던 바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작품들, 이라기보다, <배빗>이나 <...미스터 렌> 같은 자잘한 소시민의 허위의식이나 속물성, 또는 그저 날 것의 사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들이, 소위 서사성의 부족이라든가 철학이나 역사적 소명을 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싱클레어 루이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이변이나 된다는 듯이, 이이를 ‘반드시’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라고 단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후장대한 것은 중후장대한 것대로, 경박단소한 것은 또 경박단소한 대로의 멋이 있고 맛이 있는 법. 쉽사리 중후장대를 무기로 휘둘러 경박단소를 윽박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의미로 경박단소,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들은 그것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충분히 심각하게 지고 평생을 살지 아니한가 말이지. 지금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우, 앞뒤를 돌아보라. 거기 누가 있어 중후장대하다고 할 수 있는지. 거개가 다 그만그만하고 고만고만한, 경박단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우리네 세상살이일지어니.
  이 작품의 주인공 윌리엄 렌 씨도 ‘기념품과 장식 소품 컴퍼니’에서 월급 19 달러를 받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독신이라 업무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월세 집에 가느니 검표원의 친절한 인사를 받는 즐거움을 누리러 5센트 극장에 가기를 더 좋아하는 서른네 살의 영업사원. 영업사원은 영업사원이지만 필드를 누비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매출 체크하고 서류를 관장하는 내근 영업직원. 그리고 아마도 숫총각이리라. 렌 씨에게도 꿈이 있다. 증기선을 타고 세상 곳곳을 여행해보는 것. 언젠가 이룰 자신의 꿈을 위해 박봉을 쪼개 조금씩 저축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관광안내 책자들을 수집해 산처럼 쌓아놓고 그 속에서 세상 각지의 모든 문물과 문명과 자연을 익혀 나간다. 오직 그것 하나, 여행. 자바 섬의 정글, 스칸디나비아의 백야, 런던 대성당, 파리 박물관 등등, 세상 각지를 순회하는 상상으로 늘 꿈속에 살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회사의 신경질적인 관리자 모티머 길포글 씨의 호출 벨 소리만 들렸다하면 총알 같이 길포글 씨의 책상 앞으로 뛰어가 무수한 질타와 함께 새로운 업무지시를 받아야 하는 형편. 그림이 훤하게 그려지시지? 맞다, 지금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 친척, 이웃이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미스터 렌은 언제나 해고의 위협을 안고 있어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리 드물지 않은 빈도로 자진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는데, 노상 이렇게 지질한 일상이 계속된다면 어디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씨는 우리의 미스터 렌에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종의 돈벼락을 쏟아 부으니, 오래 전에 돌아간 아버지가 남긴 파르테논(뉴욕의 가난한 동네 이름) 집이 팔려 940달러가 국립은행 통장에 입금 되는 일이 벌어진다. 한 방에 자신의 4년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 것. 요즘 우리나라 로또 복권이라야 1등 해봤자 실 수령액이 10억 안팎밖에 안 되지만, 전엔 한 번 터지면 4십억, 5십억도 일상 다반사였는데, 평소 지겨운 봉급쟁이한테 한 번에 5십억 원의 거금이 생기면, 그것 가지고 ‘아더매치’,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 봉급쟁이를 계속 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스터 렌 씨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아, 상습 신경질꾼 모티머 길포글 씨가 어제와 다름없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하기 싫으면 관두시든지, 짜증을 부리자, 뭐 그러지요, 마침 일신상의 이유로 하산하기로 결심을 할까 했던 바입니다, 하고 사표를 써버렸다.
  문제는 이 소심한 미스터 렌이 진짜로 유럽 여행을 하려고 하니, 말은 쉬운데 갈까 말까, 망설임이 가볍지 않은 것. 렌 씨가 가장 신경 쓴 것은 940달러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다는, 거의 강박적인 조바심. 그러던 어느 날, 렌 씨의 눈에 신문광고 구인란에서, 아주 작은 돈을 벌면서도 영국으로 갈 수 있는 경우를 발견하는데,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란 망상에 시달리는 영국인들을 위해 식육용으로 키운 소를 싣고 리버풀로 향하는 배 메리언 호를 타고, 뱃삯대신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노동을 해주면 된다는 국제 대서양 인력 센터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래 선뜻 인력 센터를 찾아가 소개비 5달러를 내고 배에 오르게 되는데, 평생 소심하고 착한 심성으로 오직 펜대만 잡아 본 미스터 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억센 공장 노동자 출신의 피트, 모자 팔던 빈털터리 팀, 모리스 패거리의 부두목 맥가버, 이들의 ‘두목 사탄’ 등의 악당들과, 7년간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다 3개월의 휴가를 받은 선량한 모튼, 그리고 유대인 늙은이들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항해를 시작한 것인데,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 두목 사탄의 지휘로 미스터 렌은 피트와 결투를 벌이게 되고, 놀랍게도 마구 휘두른 미스터 렌의 주먹이 적재적소에 꽂히는 바람에 KO 승을 거두는 일이 벌어진다. 이제부터 윌리엄 렌은 앞으로 간혹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싸움꾼의 본성이 튀어나올 때가 생기기 시작한 것. 미스터 렌이 약간 거친 모습으로 변할 때마다 싱클레어 루이스는 그를 ‘빌렌’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어째 발음이 악당 villain과 비슷한 것도 같고.
  그리하여 선한 심성과 순진한 마음을 그대로 가진 윌리엄 렌 씨가 런던에 도착하는데, 평생소원을 이룰 첫 발을 뗀 미스터 렌이 영국 곳곳, 옥스퍼드, 런던의 펍, 대동물원 등등을 전전하면서 누구를 만나고, 런던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바라게 됐을까? 좋다 가르쳐드린다. 영국에서 미스터 렌은 자신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지리라고. 당신의 경우와 다른지 한 번 보시라. 첫째가 저녁에 집에 함께 갈 사람, 둘째가 동고동락하며 함께 일 할 동료. 결국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데, 미스터 렌은 영국에서 이것을 이룰 수 있을까? 혹시 미국으로 내빼는 건 아냐? 그건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노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