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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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우연하게 표지 그림이 촌스러운 <이런 이야기>를 사서, 정말 별 기대 없이 읽은 후에 무릎을 탁, 치고 나서 단박에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 <비단>도 읽었다. 이어서 여간해 선택하지 않는 ‘얇은 책’ <노베첸토> 마저 찾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바리코의 유혹적 글쓰기에 매료되었나보다. 19세기 말에 토리노 근방의 시골 진흙바닥 한 가운데에다 자동차 정비소를 세운 파르리 씨의 아들 울티모 파르리가 자동차가 아닌 ‘길’을 탐색하는 한 평생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 <이런 이야기>, 최상의 누에알을 얻기 위해 남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시베리아 스텝지역과 바이칼 호를 지나 아무르 강을 따라 드디어 태평양과 만나면 여기서 다시 네덜란드 밀수꾼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카와, 도야마, 나가타, 후쿠시마, 사라카와라에 도착해 다시 배를 타야 도착하는 섬까지 일 년에 한 번 왕복을 해야 하는 역마살 낀 인간 에르베 종쿠르의 이야기인 <비단> 역시 ‘길’이 중요한 매개물이었다. 이번에 읽은 <노베첸토>는 아예 부르주아 상류층부터 가난한 이민자들을 싣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왕복하는 배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이야기 역시 평생을 ‘바다’라는 ‘길’ 또는 ‘물의 유동성’이란 운동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왜 바르코는 자기 소설에서 이렇게 번번이 길에 집착할까, 또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까. 혹시 길, 그것을 따라 걷거나 말을 타거나, 배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비슷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의 보스턴 항구. 승객들이 모두 내린 버지니아 호의 일등실 연회장 그랜드피아노 위에 푸른 색 잉크로 ‘TD 레몬’이라고 인쇄된 상자 안에 이제 낳은 지 열흘이나 됐을까 한 갓난 사내아이가 울지도 않고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누워 있는 것을 필라델피아 출신의 엄청난 거구 흑인인 대니 부드먼이 발견해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기로 결심을 한다. 누구의 아이일까? 1900년, 유럽에서 밀려드는 가난하고 임신한 엄마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삼등 객실 안에서 낳기는 낳았지만 낯선 땅에서 도무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이를 상자에 담아, 누가 데려가 키우더라도 이왕이면 부잣집 마나님이 키우라고 일등실 전용 연회장의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을 터. 선원 노릇 일박이일 하는 게 아니라서 그 정도는 일반 상식이지만 대니 부드먼이 직접 아이를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피부색은 다르지만 진짜 자신이 아버지인 듯한 기분도 들고 그래 자기 이름을 앞에서 붙인 후, 상자 속 인쇄된 ‘TD 레몬’을 합해 아이를 ‘대니 부드먼 TD 레몬’으로 해놓고 보니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아, 제일 뒤에다가 20세기를 뜻하는 이태리 말, ‘노베첸토’를 얹어 아이의 이름을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라고 정해버린 내력이다.
  이날부터 정확하게 8년 2개월 11일 후에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배위에서 커다란 구조물이 쓰러지며 대니 부드먼의 등을 후려 갈겼고, 3일 후에 노베첸토는 두 번째로 고아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애초에 노베첸토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서류 적的 증명 한 장 없는 터이라 이번에 아이를 사우샘프턴에서 하선시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아이는 사라져버린다. 어디 갔을까. 22일 동안 배 안을 샅샅이 수색해도 아이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실족했을 거란 결론을 내리고 슬픔에 빠진 선원들이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하고 있을 때, 이틀 뒤 한밤중, 선원들은 처음으로, 노베첸토가 발을 달랑거리면서 자기가 최초 발견된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갑자기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객실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VIP들 가운데 미국의 유명 보험회사 사장 사모님은 나이트크림 위로 눈에서 흘러내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단다.
  이로부터 20년 후, 인생에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트럼펫 연주뿐이던 화자 ‘나’가 빅토리아 호의 밴드 멤버로 승선한다. ‘나’의 나이는 열일곱. ‘나’는 대니 부르먼 TD 레몬 노베첸토와 점점 친하게 지내, 이 작품 <노베첸토>의 가장 화려한 장면으로 다가간다. 폭풍우가 거센 밤, 빅토리아 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비틀거리며 복도를 배회하고 있다가 급기야 길을 잃어버릴 찰나, 슈트를 입고 완벽하게 안정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노베첸토에 이끌려 예의 일등실 연회장에 입장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노베첸토는 ‘나’에게 피아노의 바퀴 고정용 죔쇠를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이 죔쇠를 풀고 만다. 이어 자기 옆자리에 ‘나’를 앉힌 노베첸토는 큰 파도가 닥쳐 배가 기울 때마다 휙, 휙, 미끄러지는 검은 범선, 그랜드피아노를 지휘하는 선장처럼 꿈같은 연주에 골몰한다. 피아노가 중력에 이끌려 좌르륵 굴러 벽에 부딪힐 것 같은 순간, 마치 무언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확 쏠려 바퀴를 굴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굴리기를 몇 차례, 피아노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정신 나간 발레리노처럼 음울한 왈츠에 맞춰 춤추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 순간 통유리를 향한 돌진이 멈추어지지 않아 이 검은 범선, 검은 발레리노의 왈츠는 끝맺게 되고, 노베첸토와 ‘나’는 극도로 화가 난 선장에 의하여 아래층 기관실에 유폐당해 내려가며 킬킬킬 웃고 있다.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배 안에서 한 평생을 보내는 사내, 대니 부르먼 TD 레몬 노베첸토의 한 살이를 아름다운 문장과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알레산드로 바리코. 피아노 여든여덟 개의 건반으로 여태까지 없었던 음악을 연주한다는 착상까지는 누구나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폭풍우 부는 배에서 피아노의 고정용 죔쇠를 풀 생각을 했을까. 아이디어가 놀랍다.
  혹시 그랜드피아노를 이용해 담뱃불을 붙이는 방법을 아시나? 잘 하면 라면 한 봉지 정도는 끓일 것도 같은데. 정답은 책에 나와 있으니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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