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 아저씨 문학과지성 시인선 3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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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척, 넘기고 처음 실린 시 <불쌍하도다>를 읽고, 나는 픽, 웃었다.


  시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전문)


  지은이가 직접 쓴 서문 자서自序를 보면, 이 시집을 내면서 시인의 서랍 속에 있는 거의 모든 시를 탈탈 털었나보다. 그리하여 한 권의 시집을 탄생시켰고 자기는 발간(‘빨간’ 비슷하지만 좀 약한 느낌의 색깔, 짐작하시겠지?) 빈털터리가 됐다고 하면서, 시집을 내는 쑥스러움을 슬쩍 밑에 깔았다. 센스 있는 음식점 서빙 알바가 염주 두른 중 앞에 내려놓은, 비빔냉면 밑에 슬쩍 깔아두어 보이지 않게 만든 쇠고기 양지살 같이.
  내친 김에 두 번째 실린 시 <갈 데 없이……>도 읽어보자.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 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듯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비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전문)


  책 뒤에 실린 김현의 해설에 의하면, 정현종의 시에서 사람은 이렇게 자연과 동화될 때,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하나로서 화해롭게 존재할 때” 아름답다고 말한다고 한다. 물론 시인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바닷바람이, 내리는 눈으로, 햇빛이, 노을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며, 독자에게 가르쳐줄 의무도 없다. 그리하여 김현의 해설마저 내 눈엔 박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 시인은 사람이 바닷바람, 눈, 햇빛, 노을이 될 때 가장 아름답다, 라고 노래만하면 끝난다는 얘긴가? 그런 거 같다.
  흠. 여태 헛살았다. 나는 사람이 가재, 개구리, 붕어가 될 때가 제일 행복한 건줄 알고 새끼들도 가재, 개구리, 붕어로 키웠는데 그게 아니고 바닷바람, 눈, 햇빛, 노을이 되어야 행복하단다.
  다시 시집 이야기 하자. 잘 나가다가 엉뚱한 데로 빠지는 거, 이거 병이다, 병.
  정현종의 시들이 위의 인용한 것과 같다고, 쉬울 거라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이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를 쓴 사람 가운데 모더니스트 황동규가 있다. 이이들이 젊었던 시절에 이미 한국의 모더니즘 시는 꽃을 피울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가을, 원수 같은>에서 이렇게 가을을 호출한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 같은.  (전문)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그리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하지만 하여튼 정현종은 가을의 우수를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당연히 세월이 흐르면 더 독한 후배 최승자가 출현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 매독 같은 가을 /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라고 노래하지만 정현종의 원수같은 가을이 없었더라면 독자들이 ‘개 같은 가을’을 만나기 위해 조금 더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통의 축제 2>에서도 이이의 모더니즘은 “몸보다 그림자가 더 무거워 / 머리 숙이고 가는 길 / 피에는 소금, 눈물에는 설탕을 치며 / 사람의 일들을 노래한다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 사람 사랑하는 일이어니 / 쾌락은 육체를 묶고 /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면서 비구상적 감정의 운동 또는 시인의 뇌의 화학적 활동에 착안한 듯하다. 이 시의 부분,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은 어쩐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가사와 매우 흡사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 참 쓸쓸한 일인 거 같아” 안 그런가? 나만 그런가? 우리 이런 걸로 표절 운운하지는 말자. 피곤하다.
  이런 성향은 이이의 또 다른 대표 시 <공중에 떠 있는 것들 3 - 거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뜻깊은 움직임을 비추는 거울은
  거의 깨지고 없다.
  다만 커다란 거울 하나가 공중에 떠 있고
  거울 위쪽에 적혀 있는 말씀ㅡ
  축와선祝臥禪, 낮을수록 복이 있나니.


  거울 속에는 그리하여
  누워 있는 자와 잠든 자, 혹은
  죽은 자들만이 있다.
  요새 자기의 모습을 보는 방식이다.


  눈감으면 고향이
  눈뜨면 타향.  (전문)


  이 시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른다. 그냥 거울이란다. 자세히 읽어보면, 이 공중에 떠 있는 거울, 만사를 다 비춰야 하는 기능, 그러니까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가 견뎌야 하는 사람살이, 사회현상, 심지어 정치제도 등을 온전하게 비추는 거울로의 문학이 거의 깨졌다, 죽어버렸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이미 죽은, 깨져버린 거울 위쪽에 뭐라 씌어 있는가 하니, ‘축’ (줄 바꿔서) ‘와선’. 유신 시대를 맞이하여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누워 참선의 경지에 든 시인, 소설가 등의 문학인들을 축하하고 축복한다는 글이다. 거기다가 짓궂게 “낮을수록 복이 있나니”라니. 하여튼 시는 읽는 사람 마음이니까 만일 당신이 이 시를 달리 읽었다면 당신 생각이 맞는 거다. 하여간 내 식으로 읽은 이 시로 말할 것 같으면 모더니스트들 역시 현실 세계에 민감한 건 참여시인들과 마찬가지다. 다만 이렇게 비틀어 놓아 검열의 칼을 비켜나갔을 뿐이지.
  시집에 제일 마지막으로 실린 것이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 노트 1975>인데, 무려 스물아홉 개의 개별적인 시 또는 노트, 그러니까 그냥 끼적거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 대신 번호만 1부터 29까지 나열해 놓았다.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니 가운데 <2>를 소개한다.


  나는 내 운명이 이미 결정돼 있음을 모르고 운명을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내 운명이 결정돼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내 운명이 바뀌는 소리를 들었다. (전문)


  이렇게 있음-없음, 개선-결정-바뀜(변증?) 같은 순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행복은 행복의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시작한다. 행복은 불행이 낳은 천사이며 이미지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3> 부분) 거나, “제 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5> 부분), “승리만이 미덕이고 그것만이 고취될 때 가장 긴요한 미덕은 실패할 수 있는 능력이다.” (<6> 부분), “미답未踏의 공간은 신비롭다. 그러다가 그곳에 간 뒤에는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7> 전문) 등등 상반되는 정서가 서로를 강조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정현종을 읽었다. 1978년 출간한 시집. 낡았으나 아직도 유효한 시집. 이런 과정을 거쳐 2020년의 우리는 파편화된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시들을 만날 수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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