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 만에 세 번째 슐링크를 읽었다. <귀향>과 <계단 위의 여자>에 이어 <올가>.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슐링크가 법학을 공부했으며 심지어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법학 교수도 지냈고 18년 동안 헌법재판소 판사를 겸임했었다는 전력을 잊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슐링크의 문장들이 (말장난을 해보자면) 잡다한 수사 없이 슈링크shrink시켜 건조된 문체로 되어 있으나 그것들이 합쳐져 독자의 가슴이 시린 쓸쓸함을 만든다는 말이다.
  올가, 슬라브 민족의 여성 이름. 부두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 링케 씨와 세탁부 일을 하는 슬라브 출신 올가 노박 사이의 외동딸. 부부는 가난하고 말이 없어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딸과도 이야기를 하지 않아 아이는, 낙상을 해 몸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이웃 여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사물에 대한 개념이 생겼으며, 심지어 글 쓰는 법까지 익힌다. 돌이 되어 설 수 있게 될 때부터 그냥 서서, 선 채로 모든 사물을 관찰하는데 시간을 보내던 조금은 이상한 아이, 엄마 이름을 물려받은 올가. 그러다가 부모 둘 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3일 간격으로 세상을 뜨고, 올가는 할머니를 따라 농촌도시인 포메른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도무지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하는 올가는 선생을 졸라 도서관의 책을 열람할 수 있게 됐고 그러자 너무 자주 열람을 해서 책이 헤질 것을 두려워한 선생은 차라리 대출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졸라 오르간 연주를 연습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오르간 선생 대신에 가끔 성가대의 반주를 맡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비록 생애를 걸쳐 중고 피아노 한 대를 사는 꿈은 이루지 못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라 외로운, 그러나 외로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아이.
  헤르베르트. 혼자 설 수 있게 되자마자 뛰려고 했던 아이. 세 살부터 달리기 시작한 포메른 최고 부잣집 맏아들. 일곱 살 때 부모는 혼자 뛰는 아이의 호신을 위해 영국산 양치기 개 보더 콜리를 선물해 항상 함께 뛰기 시작했다. 역에서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나란히 뛰기 시작해 기차의 마치막 차량이 자신을 앞설 때까지 달리던, ‘빛나는 전사’라는 뜻의 이름 헤르베르트. 한 세대 전에 귀족의 칭호를 받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가 구입한 장원과 저택. 아버지 역시 철십자 훈장을 받은 보불전쟁의 영웅으로 여전히 귀족 칭호를 원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쉬뢰더 씨에 머문 상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장원 경영에다 설탕공장과 양조장을 짓고 주식투자를 할 만큼 큰 재산을 만들었으며 헤르베르트 역시 할아버지와 부모, 누이동생 빅토리아, 가족의 장원, 상당한 재산과 훌륭한 저택을 자랑스러워했다. 남매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후 두 명의 가정교사로부터 가정교습을 받고 가외로 헤르베르트는 바이올린, 빅토리아는 피아노와 성악 레슨을 따로 받는다. 장원의 아이들과 비교해 너무 우월해 외로운 남매의 유일한 친구가 역시 외로운 성격의 올가. 이들을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았다. 사진을 보면 ‘헤르베르트와 올가는 빅토리아를 떠받드는 걸까? 빅토리아가 오빠와 연상의 친구를 지배할 줄 아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는데, 이건 틀림없는 복선이리라.
  견진성사를 끝내고 빅토리아는 부모를 졸라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기숙여학교에 들어가고, 올가는 포젠에 있는 국립초등교원양성소에 가고 싶어 하지만 할머니도, 목사도 여자가 더 이상 교육을 받는 건 무의미하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혼자 공부해 요즘말로 검정고시를 보리라 작심을 한다. 다행히 이십 리 떨어진 상급학교에 재직하는 선량한 여선생을 만나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헤르베르트 역시 자신의 교과서를 제공해주어 훗날 시험에 합격한다.
  헤르베르트는 열여덟 살이 되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근위부대에 입대를 해야 하니 그 전에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야 할 터. 훗날 설탕공장과 양조장이 딸린 장원을 물려받아 경영을 할 것이라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가 농장이나 공장 주인으로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있어서 곤란한 상태였다. 헤르베르트는 언제나 낮 동안 태양과 함께 달리는 꿈속에 살았다.
  빅토리아가 떠난 후, 올가와 헤르베르트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는 없었다. 보는 눈 때문에. 집에서는 할머니가 올가의 공부를 끊임없이 방해해 숲 속의 한 공터에서 책을 펴 놓고 공부하다가 날이 추워지자 헤르베르트가 사냥용 오두막을 가르쳐 줘 그곳에서, 때론 교회의 후원자를 위한 칸막이 좌석에서 쉬지 않고 공부를 이어간다.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빅토리아는 올가를 잊지 않고 산책과 차모임에 초대를 한다. 그러나 헤르베르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촌스런 여자애하고는 상대하기 싫어. 올가 링케는 슬라브 식 이름 아냐? 그런데 왜 내 앞에서 당당하게 구는 거야? 맞먹듯이?”
  하지만 헤르베르트는 이 말을 들은 다음에서야 올가를 자세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한참을 두고 쳐다볼 거야. 네 얼굴, 네 목, 네 목덜미. 바로 너를. 나는 여태껏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어. 너는 나와 결혼할 거야.”
  그러나 올가가 열악한 곳에서 공부하는 일 년 동안 둘은 성적 접촉을 하지 않는다. 헤르베르트가 올가를 범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올가에게 헤르베르트는 장원 주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그는 그녀가 그냥 마을 처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해가 되고, 쉬뢰더 저택에서는 거액을 들여 불꽃놀이를 하고, 올가는 최우수 성적으로 국립사범대학에 진학을 하고, 헤르베르트는 근위부대에 입대해 파란 상의와 하얀 바지로 된 제복을 입는다. 올가는 2년 과정의 교육을 마친 후 예전에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고, 헤르베르트는 독일-서남아프리카로 파병을 가기 전에 3주 기한으로 집에 와 올가와 드디어 첫 밤을 지낸다. 꼼꼼한 피임과 함께. 그리고 이별. 첫 이별.
  헤르베르트가 파병을 가자마자 빅토리아는 자기가 아는 모든 친구의 아버지들에게 부탁하여 결국 올가를 지방행정부의 행정장관 명령에 의하여 동프로이센의 틸지트 지방 북쪽에 있는, 교사 한 명이 전 학년을 담당해야 하는 작은 초등학교로 발령 받게 한다.
  몇 년이 지나 헤르베르트가 귀환을 하고, 부모에게 올가와의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하지만, 그럴 경우엔 모든 상속권을 박탈하겠으며 평생 의절을 각오하라는 통보를 얻은 그는 조국의 위대한 지리학자 훔볼트의 발자취를 좇아 여행을 떠난다. 아르헨티나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라나 강을 따라 로사리오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고 코르도바로 가서 말을 사 투쿠만으로 가 안데스 산맥에 이르기 직전에 독사에 물려 혼절한다. 인디오에게 구출돼 다시 투쿠만으로 돌아오지만 열병에 걸린 상태였고, 열병에서 다 낫자 시간과 돈이 고갈되어 귀국한다. 헤르베르트는 또다시 즉각 러시아와 핀란드의 접경지 카렐리야로 가 혹한의 눈 속에서 혼자 일 주일을 버티고 역마차 역에 도착해 스스로 생명을 구한다. 이 일을 기점으로 헤르베르트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으며 단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믿기 시작한다. 이어서 그의 여행은 브라질, 콜라 반도,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를 넘어 심지어 북극해를 향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올가가 했던 일은? 기다림.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 기다림이 길수록 더 헤르베르트를 사랑하게 되는 일. 동프로이센의 벽지에서 재능이 뛰어난 아이 아이크를 더욱 훌륭하게 가르치고 돌보고, 상급학교에 갈 수 있게 지원하는 일. 올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현명해지고 넓은 포용의 가슴을 지니게 되면서, 광활함과 총과 칼에 과감하게 도전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지 투표권도 없는 여자에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남자들의 무모함을 깨우치고 싶어 한다. 세월은 흘러 흘러, 올가는 가슴에 여전히 길을 떠난 헤르베르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올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기에 이른다. 가슴이 먹먹한 이야기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