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호르헤 셈프룬 지음, 윤석헌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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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서재 친구 ‘서산_影' 님의 글을 읽고 서슴없이 사 읽은 책.
  호르헤 셈프룬. 이런 사람을 파란만장하다, 라고 해야 할 터. 1923년 12월 생. 아버지 호세 마리아 데 셈프룬 이구레아는 법률학자이며 톨레도 도지사를 지냈으면서 시집도 두 권을 낸 박식하고 부유한 부르주아이며, 어머니 수사나 마우라 가마조는 아버지(호르헤의 외할아버지)가 무려 다섯 번이나 수상을 역임한 가문 출신이니 남편보다 더 휘황찬란한 정통 귀족이었다. 부모가 금슬이 좋아 순서대로, 마리벨, 수사나, 곤살로, 호르헤, 알바로,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이렇게 두 딸과 내리 다섯의 아들을 두었으니, 프랑코가 내전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엄마 소원대로 입헌군주국 스페인의 대통령이나 작가가 되었을 호르헤 셈프룬이었다. 그러나 1936년 7월에 시작한 내전으로 정국은 돌이킬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와중에 스페인 공화국의 처절한 분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이때 호르헤의 아버지 호세 셈프룬은 재 네덜란드 스페인 공화국의 공사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는데, 당연히 일곱 아이 모두와, 취리히 호수 인근 베덴스빌 마을 출신 독일어 가정교사 여성이며 나중에 계모가 될 여인을 데리고 벨기에 국경을 넘는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떴다.
  벨기에 국경을 넘을 당시부터 벌써 유럽 각국이 프랑코가 세운 부르고스 정부를 인정하는 분위기라 스페인 공화국의 외교관 여권을 가진 자들을 체포해야 할지, 통과시켜야 할지 망설이던 수준이었으니, 39년에 뮌헨협약에 의거하여 독일의 전차와 기관총 부대가 프라하에 진입을 하던 즈음 스페인 공화국의 기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였다. 이 책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는 스페인의 내전시기, 즉 ‘나’ 호르헤가 열다섯 살 시기를 즈음한 시절,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칼뱅 중학교를 거쳐 파리의 앙리4세 고등학교에 재학할 무렵의 시절을 그린 자서전적 작품이다. 그렇다고 1939년만 서술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처음 기억난다고, 분명히 어머니였을 것이지만 누군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주입된 내용이 기억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1925년경부터 1990년 프랑코 사후 필리페 곤살레스 정부의 문화부장관을 지내며 마드리드 알폰소 11세 거리의 장관 공관에 거처하던 시기까지 일정한 순서 없이 글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기억을 서술하기 때문에 읽는데 집중이 필요한 책이다.
  게다가 60년이 넘는 드라마틱한 세월을 살았으니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빽빽하게 등장하고, 다양한 사건을 설명하여야 하는데, 문제는 여태까지 말한 소재나 스토리 등 일종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이이가 빌려 쓰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를 비롯한 문학, 현학적이기까지 한 신학과 주로 공산주의 쪽 철학이라는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본문이 36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문장 자체가 유려하고, 지적이고, 섬세하기까지 해서 저절로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어 여간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나중에 큰 누나 마리벨과 결혼하는 아버지의 비서, 그리고 이 책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을 헌정한 ‘장 마리 수투’에 의하여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입문한 후에 프랑스어에 몰두, 이후 지드의 <팔뤼드>를 비롯해 말로의 <인간 조건>, <희망>,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심지어 작가 자신이 전에 쓴 작품 등 소설까지 섭렵하는 과정. 마드리드가 함락됨으로써 이제 조국을 떠나 망명지의 낯선 영토에서 모험을 나서야 하는 장면들이 빼어난 문장과 인용으로 나타난다.
  호르헤 셈프룬의 생애를 감추고 독후감을 쓰려 했지만 특이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면 읽는 분들이 공감하지 못하겠기에 소개한다. 이이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 교도였으며, 이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셈프룬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가지 않으려 갖은 노력(거짓말)을 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된다. 내전 중에 헤이그에 공사로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에 왔고, 파리에서 공화국의 패배, 독일의 프라하 점령과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전투 한 번 없이 파리를 내준 프랑스와 페텡에 의한 비시 정부를 겪으며, 반파시스트 운동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해 활약하다가 스무 살 때인 1943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진다. 부헨발트에서의 경험이 워낙 커서,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덕택에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나은, 그러나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남아 1945년 소련군에 의하여 해방이 되고나서도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때문에 천생 작가인 셈프룬일지언정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십여 년을 보내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1945년 스페인 공산당에 가입해 여러 가지 가명을 쓰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으며 세포 또는 스파이로 활약한다.
  1964년에 이르러 스페인 공산당에 의하여 추방된 이후에 비로소 (프랑스어로)글을 쓰게 되니 자연스럽게 부헨발트 수용소 등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많은 소설과 산문, 영화작업 등을 했고, 나중에 스페인의 문화부장관까지 역임하다가 2011년에 자연사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초년 운이 좀 복잡해서 그렇지 한 시절 잘 살다 간 사람이긴 하다.
  이 자전적 작품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는 자신의 소년시절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하는 1939년을 기억해 20세기 말에 쓴 것으로 그 시절, 스페인 공화국이 멸망해서 파시스트가 집권을 하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때가 자신에게는 찬란한 빛의 시절이었음을, 그러나 지독하게 우울한 빛의 시절이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약간의 독서력이 있는 분들에게 후회 없는 선택일 것이라고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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