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선언 범우문고 270
신채호 지음 / 범우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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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 스타 강사 김용옥이 올 3월에 TV에 나와 특유의 미라 같은 목소리로 강講을 하기를, 기미독립선언서가 국한문혼용체일지언정 어찌하여 거의 전적으로 한문으로 씌어 있는 줄 아느냐고 묻더니,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들도 글을 보면 이해를 할 수 있게 쓰라고 최남선에게 당부를 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랬더니 패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몰랐던 것을 새로이 아는 기쁨, 조선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고했던 뜻의 창대함에 새삼 옷깃을 여미는 거룩함을 느끼는 듯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무려 이과 공부를 했음에도, 기미독립선언서를 모두 외우지 못하면, 여러 말 할 거 없이, 국어선생한테 겁나게 얻어 터졌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서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서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476년이 흘러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한글 정도는 다 익히고 있던 시절에 이런 <독립선언서>가 다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김용옥, 이 진보적 꼰대라고 자칭하는 인물로 하여금, 당대 국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언어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이리도 상찬했던가. 하긴 뭐 전형적인 먹물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한다. 그의 소장학자 시절, 검정 가죽점퍼와 착 달라붙는 검정 가죽 바지에 도리우치 모자를 쓰고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 정리를 봐서라도.
  깊이 보다는 말재주로 널리 우리의 역사를 알리고 있는 잘 팔리는 대중적 역사교사 설민석은 TV에 나와, 당시 지도자들이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이란 요정에서 낮술 한 잔 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더니 서른 세 명이 스스로 줄 맞추고 발맞춰 종로경찰서로 나란히 행진한 사건이라고 했다. 애초부터 <독립선언서>는 일본에게 조선 강역의 자치권을 부여해달라는 청원서 형식으로 만들 예정이었다가, 나중에 최악의 친일파로 변신하는 최린의 반대로 자주권에서 독립선언으로 바뀐다.
  3.1운동을 폄훼하려는 마음은 없지만 적어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물론 이런 시도는 삼사십 년 전부터 안병욱 등 당시 소장학자들(지금은 명예교수나 이미 은퇴한 이들)의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여전히 설민석의 요정, 자치권 운운의 발언은 당장 33인, 그래봐야 거의 다 나중에 변절해 친일의 함정에 빠져버린 소위 민족대표들의 후손들에게 경을 치고 만다. 어쨌건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몰래 등사해 그것을 뿌리며 학생, 시민, 농민들은 전국방방곡곡에서 독립을, 쟁취하는 대신 요구하기 위해 맨손으로 일경의 총칼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어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다가 거의 가망 없이 깨져버린 사건이다.
  소위 민족대표들이 모여 술김에 낭독 한 번 한, 어렵기 그지없는 거의 한자문서의 현학적 미사美辭 자체를 당시 인민 가운데 몇 명이나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었겠는가. 어찌 강역을 무도히 침탈한 도적들에게 맨손의 만세운동을 통해 독립을 구걸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우리의 민족대표란 것들이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단재도 <조선혁명선언>에서 3.1운동이 “일반인사(소위 민족대표 33명)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족의 분용전진奮勇前進의 의기를 때려 부수는 매개가 될 뿐”이라 딱 꼬집는다. 그리하여 일반 인사들의 뜻대로 자치권을 얻는다고 쳐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일 수밖에 없음을 명시한다.
  이 <조선혁명선언>은 당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중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인사들 가운데 독립의 의지가 굳고 글이 좋은 신채호에게 부탁하여 ‘의열단선언문’을 작성하고자 했던 것인데 범위를 의열단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 하는 모든 민족주의자들의 선언으로 함이 마땅하다고 여겨 조선혁명선언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단재는 이미 널리 알려진 민족주의 역사가였으며, 독립운동가, 항일 언론인, 문인, 아나키스트 사상가로 접어들었던 상태. 따라서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무력 투쟁이며, 백년을 기다려도 ‘제국’을 칭하는 일본과 대등한 무장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전면전 대신 적의 핵심을 격파하는 테러리즘에 경도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혁명’이라 읽는 큰 목표를 위해 조선의 민중들은 건설을 위한 파괴, 즉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을 건설하는데 일치하여야 한다고 집중한다.
  이 혁명으로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2천만 민중들의 힘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단재는 결론적으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라고 선언하며, 건설을 위한 파괴, 독립(혁명)을 위한 폭력의 대상을 구체화하여, 폭력, 즉 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을 적시한다.
  가.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나.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다. 정탐노, 매국적敵
  라. 적의 일체 시설물.


  단재 신채호.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식한 바가 정의라면 단연 정의를 위해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행하는 인물. 이것은 그의 역사철학,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이라는 신념에서 비롯한다. 아와 비아에 관한 논의는 <조선 상고사>의 제 1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놀랍게도 이 책의 두 번째 파트에 <조선상고사>가 첨부되어 있다. 당연히 논문 전편이 아니라 제 1편인 ‘총론’만 싣고 있는데, 나 같은 아마추어들은 총편만 읽어도 단재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데 충분하리라 믿는다.
  <조선혁명선언>을 지은 4년 후, 단재는 1928년에 베이징과 다롄에서 개최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대회에 참석했다가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따르기 위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가 일경에 의하여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형을 산다. 형기 중에 조선일보가 이를 입수해 1931년부터 연재했으나 단재는 옥중에서 연재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아직 연구가 미흡하다는 것이 첫째고, 조선일보가 일본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신문이라는 사실에 분노해서였다.
  신채호는 굽힘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조선상고사> 총론에 썼다시피 그의 걸출한 기상은 “거연히 패망한 이조李朝의 기정旣定한 있는 국면에서 그리 된 것”이겠으나 지금 다시 태어나도 시절의 꼿꼿한 선비로 살았을 것이다. 시절이 어려울 때마다 신채호가 그립다. 즉, 언제나 그가 그리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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