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김영랑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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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 김윤식, 하면 떠오르는 시가 표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사진으로 보면 참 강건해 보이고, 실제로 어려서 강진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검거되어 대구까지 이송돼 짧게나마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일본 유학 후에 중앙에 진출하는 대신 강진에 칩거해 시를 쓰고 음악을 들을 뿐 이름자를 왜식으로 바꾸지도 않고 왜의 신사에도 참배 한 번 하지 않은 채 그 시절을 버텨냈으니 덩치 못지않게 마음도 참 옹골졌을 듯하다. 이런 이가 <모란이....> 속에서 사용한 시어를 보면 에둘러 말하지도 않고 곧바로 설움, 서운, 섭섭, 울음, 슬픔 등의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차하면 유치나 신파로 빠져들 위험이 있는 이런 단어들이 비탄이나 통곡의 벽에 막히지 않고 다시 새로운 희망으로 향하고 있는 점이다. 읽어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전문)


  그렇지 않은가. 여차하면 유치찬란할 수 있는 시어들이 마지막 ‘기다림’의 출구를 통해 가볍게 신파에서 벗어나고 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런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지만, 아직도 이 시를 읽는 일은 너무도 충분하게 유효하다. 작은 아이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니까 어떻게 오월 어느 날이 무더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거야 음력 오월이니까 그렇지. 대략 하지부터 한 달 사이에 모란이 툭 떨어져 꽃잎이 시들고 자취마저 없어졌단다. 그러자 이제 시인의 남은 한 해는 극성의 여름과 가을, 겨울 모두 사라지고 오직 다시 모란이 필 내년의 봄을 기다린다니, 영랑의 지사적 생활을 기억하는 이들은 ‘봄’을 조국의 해방으로 여겨도 나쁘지 않겠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는 그냥 시인 개인의 ‘슬픔의 봄’으로 읽는 것을 양해해주기만 바랄 뿐이다. 세상에 슬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슬픔이라 말하는 사람이 드물어 그 가운데 몇 명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대표시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데 의견이 없으나, 나는 아무래도 영랑의 시, 하면 그이 특유의 짧은 시편들, 제목도 없이 그저 번호만 죽 늘어놓은 시들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쪽이다. 이 시집에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라 제목을 두었으나 사실 이 시는 제목이 없거나 <2>라는 번호만 달려있는 시다. 옛 시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당시 언어로 낼 수 있는 낱말 특유의 향을 흠향해보는 것인데 출판사 시인생각의 한국대표명시선 100 시리즈는 약간 과하게 시를 현대어로 고쳐서 조금 불만이다. 모바일로 독후감을 읽으실 분은 감상하기 불편하겠지만 그래 원래 시와 대조해 비교해보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전문)



  2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 아래 우슴 짓는 샘물가치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붓그럼가치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전문)



  읽기에 어떠신가. 나는 <2>가 더 낫다. 그러나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이 표음문자라서, 시간이 흐르며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를 해 읽기는 읽어도 도통 모르는 단어를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그것 아니더라도 영랑은 자신이 시어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 / 꽃은 가득 피고 벌떼 닝닝거리고 // 그대 내 그늘 없는 소리를 들으실까 / 안개 자욱이 푸른 골을 다 덮었네 (후략)(<내 홋진 노래> 또는 <13> 부분) 이 부분에 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홋지다”가 무슨 뜻이지? 심지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는 우리나라의 모든 책 가운데 영랑의 시에서만 딱 한 번 등장한단다. 목포대학 허형만 교수가 분석하기를 하나를 뜻하는 단어 ‘홑’과 ‘기름지다’ 할 때의 ‘지다’를 합해 ‘홀로 남겨져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다’라고 했다. 그렇게 단어의 뜻을 알고, 적어도 이해는 하고 시를 읽는 일과, 전혀 모른 채 읽는 건 또 얼마나 다른지. 그리하여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는 이 시대에 읽어도 쿨하게 다가온다. 독후감을 쓰고 있는 휴일 새벽의 이 홋진 시간에.
  세월이 흘러 1940년대에 이르면, 일제에 의한 내선일체 사업이 극성을 이루고,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조선의 시대상도 암울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독립이란 것이 몇 년 후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많은 지식인은 시대에 좌절해버리고 더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에 기생하기 시작한다. 영랑은 여전히 강진, 40년대 기준으로 보면, 옛 시절의 귀양지에 불과한 촌구석에 틀어박혀 회의와 죽음의 골짜기를 탐색하기도 한다. 이 시절에 쓴 시 <거문고>를 읽어보자. 우리는 일본인들을 흔히 원숭이로 얕잡아보고, 원숭이의 다른 우리말이 잔나비인 것을 염두에 두자. <거문고>를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감한다.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위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게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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