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줴의 겨울
디안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이름이 특이하다. 디안笛安. 피리소리에 편안하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떠오른다. 나도 손녀, 손자 가운데 한 명의 이름 안에 적笛자를 넣고 싶어 하는데 마땅히 앞뒤에 놓일 글자를 여태 찾지 못했다.
  이이의 아버지 리루이(李銳)는 베이징 태생으로 1969년 1월에 부모(작가의 조부모)가 동시에 사망했다는 걸로 미루어 문화혁명의 와중에 봉변을 당한 거 같다. 졸지에 고아가 된 리루이는 조상들이 살던 쓰촨성 쯔궁으로 가는 대신 산시성의 산골 도시 뤼량으로 옮겨 6년간은 농부로, 2년 동안은 공장직공을 하다가 1974년 첫 번째 소설집 <합장묘合墳>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안에서보다는)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리루이는 산시성에 터를 잡고 훗날 산시성 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하게 될 장원과 결혼하여 1983년에,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에 호응해 외동딸인 리-디안을 낳는다. 왜 이리 태생에 관해 서론이 긴가 하면, 작품의 무대가 베이징에서, 대륙의 기준으로 치면 좀 떨어져 있는 산골지방이며, 유난히 겨울이 긴 동네라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룽청(龍城)이라는 가상의 철강 산업 도시에 아들 사형제가 있었다. 모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당시 중국법령에 따라 딸이건 아들이건, 물론 쌍둥이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딱 한 명만 자손을 둘 수 있었다. 그래 네 형제의 아버지는 앞으로 보게 될지 못 보게 될지도 모르면서 각각의 이름자에 동, 서, 남, 북을 넣으라 했단다. 그래 맏이가 낳은 딸은 둥니(東倪), 둘째가 낳은 아들이 일인칭 시점의 주인공 시줴(西決 ‘결’은 삼수변이 아니라 이수변), 셋째가 낳은 딸은 난인(南音)이고 넷째는 아직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딸이건 아들이건 하여튼 이름은 베이베이(北北)라 짓기로 했다. 어떠셔? 이리 써놓으니까 화목한 가정 같지? 그래, 한 번 들여다보자.
  맏이는 연예인보다 더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아가씨를 격투 끝에 아내로 차지했다. 격투 당시에 같은 철강회사에 다니던 맞수를 하마터면 용광로에 빠뜨려 죽일 뻔했다는 이유로 도시에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외곽지역으로 좌천당한 경력도 있다. 이리 치열하게 투쟁해서 맺은 부부의 공통적인 취미생활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하면 더 큰 상처를 주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연구하고, 연구한 결과를 실행에 옮기는 것인데, 일단 자기가 설계한 이론을 실험할 때가 오면 그 자리에 누가 있든지 전혀 상관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격투기 수준의 진검승부를 벌인다는 것. 이런 취미생활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는 공개 독후감에서는 밝히지 못할 스포일러. 어쨌든 이들 사이에 끼어 어린 시절을 보내는 둥니가 정상적인 상태로 성장하기 바랄 수는 없겠지? 둥니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큰 뜻을 품고 싱가포르로 날라버린다. 둥니는 하룻밤 테이블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대가로 미화 천 달러짜리 팁이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올 때 세상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 문제임을 실제적으로 체험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맏이 부부는 딸이 어떻게 사는지에 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이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를 통해 삶의 의의를 찾는다.
  둘째 부부는 눈과 날개가 하나씩만 달려있어 암수 한 쌍이 함께 해야 날 수 있다는 비익조比翼鳥나 다른 뿌리에서 나왔으나 둘이 한 몸이 된 연리지連理枝 같은 전설적인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았으나 이들의 아들 시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남편이 직장인 철강공장의 설계 사무실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가슴을 두 손으로 쥐어짜면서 급사하고 만다. 직원들이 황황히 소식을 갖고 시줴의 집에 들러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남편의 운명을 전하자, 아내는 직원들에게 차나 한 잔 하시라고 말을 하고는 조용히 부엌으로 가는 것 같더니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층 베란다에서 자유낙하에 성공, 비익조의 신화를 완성시킨다. 좋다 이거다. 너희들 사랑은 이렇게 절정에서 마침표를 찍는 건 좋은데, 이제 발간 세상에 홀로 남은 우리의 주인공 시줴는 어찌 살라고. 그리하여 열 살 먹은 시줴는 작은 아버지, 셋째의 집으로 들어가 학교를 다니고, 심지어 대학까지 졸업하고 이제 룽청의 중 고등학교에서 물리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셋째네 부부는 완벽하게 선한 인물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은 일컬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칭한다. 상당한 수준의 미모를 지녔으나 아쉽게 지적 능력을 개발하지 않은 실제 내 처형은 나를 보고 가끔, 불경스럽기도 하고 망측스럽기도 하고 남우세스럽게도 ‘부처님 가운데 다리’라고 하는데, 하여튼 비슷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발기부전 증세가 있다는 건 아니니까 제위께서는 반드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란 말을 쓰시기 바란다. 진짜 천의무봉, 순진무구한 남녀. 그래도 할 건 다 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서 딸 하나, 세상 무서운 거 없고 구김살 없는 난인을 두었다. 난인뿐만 아니라 조카 시줴, 큰 조카 둥니, 심지어 뜻대로는 되지 않지만 그 외 주위의 모든 친척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돌보고자 하는 무골호인. 부부가 다 그렇다.
  넷째이자 막내인 정홍(鄭鴻) 룽청 최고 명문인 룽청제일중고등학교의 고어古語 전문 국어 교사로 재직하며 성가해 잘 살다가 그만 스캔들에 빠져버리고 만다. 강의하다가 간혹 주화입마에 빠지면 영혼을 쏟는 명강의를 펼치는 바람에 숱한 남녀학생의 우상으로 군림하던 정홍 선생을 스승이 아니라 이성으로 상상해보지 않은 여학생이 많지 않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탕뤄린이란 학생하고 드디어 추문이 발생해 소문이 곳곳으로 퍼지자 급기야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서 친정으로 가버렸고, 탕뤼린 역시 저 먼 곳에 있는 시골 외갓집으로 보내졌으며, 정홍 선생은 세상의 온갖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진짜 중국인처럼 때를 기다리며 모든 고통을 인내하고 있다. 그러다 배 나온 중년으로 접어들었고, 이름은 벌써 지은 베이베이도 만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다음엔 세 명의 사촌들. 둥이, 시줴, 난인. 이들은 말 그대로 형제. 어쩌면 진짜 형제 이상으로 긴밀한 감정으로 얽혀 있다. 친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감정이 더 과장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이 되기 전엔 집성촌 안에서 사촌이란 건 정말 긴밀한 관계였다. 근데 얘네들은 좀 심하다. 둥이와 시줴는 3년 차이, 시줴와 난인이 5년 차이. 이들은 기꺼이 서로 얼싸안고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고, 심지어 가슴팍에 안겨 펑펑 울기도 한다. 놀라운 우애. 이건 혹시 작가 디안이 여성이라 여자 형제들의 기준으로 책을 썼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단연코 연애 이야기. 그러나 그것 뿐? 천만의 말씀. 겉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끼고 아픈 곳을 불어주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어하는 마음이 조금도, 정말 조금도 없었을까? 이들 사촌 남매들 말고도 윗대의 네 형제간에도?
  이렇게 네 형제와 그 가족들이 만드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 이 책이 중국에서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왜 그런고 하니, 빤히 들여다보이는 해피 엔드를 향해 정해진 수순을 밟아가기 때문. 독자들은 애초부터 자기가 예상했던 착한 결말대로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걸 읽고 만족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작가 디안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책의 초판이 2009년. 날로 우울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소설만 읽던 독자들에게 이런 따뜻하고 행복한 결말이 어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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