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 40년 - 4판 범우문고 20
변영로 지음 / 범우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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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군수의 직을 하던 변정상卞鼎相에게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판사를 하다가 “왜놈의 사냥개 노릇은 죽어도 못한다.”며 법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해 안중근을 변호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해방 후에도 반민특위 재판장을 역임했던 강골의 변영만이요, 둘째는 제 1회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신흥공화국의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까지 역임하는 변영태이며, 셋째이자 막내가 죽기까지 불의와 악수는커녕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당대의 세월을 보내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크게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명정酩酊 40년을 보내게 되는 영문학자, 교육자, 신문기자,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이니, 변 군수께서 다른 건 몰라도 아들 농사 하나는 근사하게 지었겠다.
  수주가 어렸을 때 이름이 ‘영복’이니, 변 군수께서 일찌감치 외출하신 하루는 아침부터 술에 잔뜩 취해 아버지 아니 계신 사랑에 누워 있는데, 존장의 벗인 정영택 옹께서(당시엔 30대였지만) 사랑 미닫이를 열고 보니 열 살도 아니 된 쬐그만 게 주인 없는 사랑에 홀로 누웠던 것. 그리하여 정옹이 진중치 아니한 어조로 말씀하시기를,
  “영복아!”
  “……”
  “아 이놈 영복아!”
  “원숭이 왔나?”
  성미를 잘 아는 정 교관은 못 들은 체,
  “어르신네 어디 가셨니?”
  “어디 출입하셨어.”
  “어딜 가셨을까?”
  “모르지.”
  “이놈, 어린 놈이 대낮부터 술이 취해서 학교도 가지 않고.”
  “대낮이라니, 술은 밤에만 먹는 거야?”
  기경(奇驚)하기로 유명한 정 선생도 이에는 어안이 벙벙,
  “에익, 고자식.”
  하고 떠나려 할 때 나(수주)는 한걸음 더 내치어,
  “여보게, 히로(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된 양담배) 한 개만 주고 가게.”
  망설망설하다가 홱 한 개를 던져 주고 총총 문을 나시었다. 는 거 아닌가.


  수주 자신도 다섯 살인지 여섯 살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저 먼먼 옛 시절부터 술 한 바가지 얻어 마시기 위해 자기 키보다도 더 큰 술독을 기어오르기도 하고, 혹시 개평 술이라도 얻어 걸릴까 싶어 아버지와 벗들의 술상을 지키다가 아이 놈이 술 좋아하는 걸 이미 아는 어른들이 약만 올리고 술을 주지 않자 자리를 박차고 나서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 유쾌하고 때론 창자가 아플 정도로 웃긴 《명정 40년》을 시작한다.
  실로 전설적인 이야기들.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숱하게 들은 수주 변영로의 술에 얽힌 기행들. 그저 교사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온, 거의 신화 수준이라 믿기 어려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공초 오상순, 횡보 염상섭, 성재 이관구와 더불어 네 명의 돈 없는 룸펜 인텔리겐치아들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하던 고하 송진우에게 나중에 좋은 글 한 편을 기고할 테니 원고료로 50원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 얻은 돈으로 술과 고기를 사들고 성균관 위에 올라 대취했던 일이다. 잔뜩 술을 퍼마신 것 까지는 좋았는데, 난데없이 쏟아지기 시작한 큰 비를 맞고 누웠다가 공초가 선언하기를 옷이야말로 자연과 인간을 이간시키는 쓸데없는 물건이라 칭하며 옷을 찢어버리고 네 명의 나한이 몸에 일호一毫의 천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소를 타고 혜화동까지 진출한 일이었다.
  공초와 횡보는 늘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어서 이 일화를 나 역시 구전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줄 때 문제의 한 명, 성재 이관구가 여간해 생각나지 않았었다. 책을 읽어보니 이관구라는 동아일보 기자와 그의 춘부장을 비롯한 집안사람들과 얽힌 허리가 끊어지고 창자가 아프게 웃기는 술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었으나, 그건 일독의 가치가 넘치고도 넘치는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고 내 말이 과장인지 확인하시기 바란다.
  나 역시 애주가로 불리지 않으면 매우 섭섭한 정도의 술꾼이지만 감히 수주와 곁을 대할 수 있을까보냐. 수주는 나이 쉰이 넘도록 약 한 봉지 먹어본 적 없는 강골의 사내였단다. 당시 사람들이 자시던 소주는 지금처럼 20도도 되지 않아 술인지 물인지 밍밍한 소주가 아니라 똑 부러지게 40도짜리였다. 그것을 되, 1.8리터 단위로 몇 병을 앉은 자리에서 마셨으며 당연히 지구 온난화 전이라 오줌줄기까지 얼려버릴 정도로 추운 겨울밤에 술에 취해 떡이 되어 길거리에 횡와 취침橫臥就寢 가로누워 자면서 그새 내린 백설로 이불을 삼아도 다음 날엔 어김없이 학교나 신문사로 출근을 해 우우풍풍雨雨風風,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단 한 번의 지각도 없었다는 사내였다.
  수주, 하면 《명정 40년》. 그러나 《명정 40년》으로 그의 이름을 취생몽사의 대명사로 알면 오산이리라. 그 역시 백형이나 중형을 닮아 이화여전, 중앙학교, 성균관대학 선생을 거쳐 동아일보 신문기자를 하면서 한 번도 일본을 위한 문장을 써 본 적 없고, 창씨개명은 그의 앞에서 거론조차 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손기정 일장기 말살까지 획책했던 울분의 지사였다.


  인터넷 공간의 오랜 벗들은 몇 번 들으셨을 터이지만, 내게도 수주 못지않은 명정의 시절이 있었으니 그 일탈의 광태를 한 번 소개한다.
  때는 1981년 봄. 서울대를 다녔고 지금은 내가 사는 동네의 대학에서 훈장을 하는 김군과 나는 날이 좋다는 핑계로 학교 앞 청화식당에서 아침 아홉시부터 막걸리 잔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한 말斗(약 18리터, 즉 일인당 9천cc)을 마시니 점심 때가 됐다. 밥 대신 막걸리 한 말을 더 마시고 나니까 수업을 파한 후배 아이들 둘이 고개를 디밀었다. 산업공학을 하는 남자 후배, 화학을 전공하는 여자 후배. 둘이 무슨 썸을 타는 관계는 분명히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만나서 한 잔 하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틀림없었다. 후배들에게 동무를 소개하고 반 말을 더 시켜 마저 마시니 이제 석양이 내리려는 듯. 우리는 밀주 막걸리 몇 통을 더 달라고 해 손에 들고 모교 운동장을 둘러싼 잔디밭으로 진출해 두어 되를 더 비웠다. 잔디에 누워 청하디 청한 하늘을 보다가 내가 동무에게 말했다.
  “벗어버리자.”
  그래 나하고 멀리 관악산에서 온 동무하고 둘이는 예전 성균관의 네 나한처럼 일호의 천조각도 몸에 걸치지 아니하고, 내 옷은 화학 공부하는 아이한테, 동무의 옷은 산업공학을 하는 아이한테 봐달라고 한 채 운동장을 감싸 안은 도로 위를 뛰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늦봄의 황혼이라, 교정을 바라보고 오른 편의 중앙도서관에서 한 떼의 학생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학생식당으로 교정 밖의 밥집으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오직 하나, 발바닥이 무척 아프다는 거. 남학생들은 우리를 손가락질 하며 웃기에 바빴고, 여학생들은 갑자기 자기들 시선을 정면으로 하고 정색을 하고 있었으니 그래도 옆 눈으로 우리의 알몸이 다 보일 터이니까. 교정 정면에 있는 본관 건물 오른 편으로 들어가 교무과, 학적과 등의 사무실을 거쳐 왼편으로 나와 강당 옆을 끼고 다시 운동장을 두른 잔디밭으로 돌아오니 후배 아이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려가며 아까 마신 막걸리를 게워내고 있었다.
  벌써 그게 40년 전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귀밑까지 뜨거워지는 게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당시 내 나이 이십 대였다는 것이 유일한 변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몸질주는 내 일생 가장 큰 수치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가 포경수술을 하기 전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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