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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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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생애를 짧게 이해하려면 <문맹>을 읽어보면 충분하다. 이이의 정체성은 망명자. 망명지에 떨어져 이국의 문자로 작품 활동을 하는 불리한 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프를 읽으면 간혹 섬찟한 느낌이 든다. 불멸의 작품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다.
  상도르, 라는 이름의 남자.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 헝가리(로 추정하는 나라)의 작은 마을, 작은 학교에 단 한 명의 교사라 모든 학년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는 선한, 아니면 적어도 악하지 않은 심성을 지난 사람이다. 몇 년 전, 일단의 집시무리가 지나가면서 고을에 열여섯 살 먹은 예쁘게 생긴 소녀 에스테르를 혼자 떨어뜨려놓고 간 적이 있다. 상도르는 이 아가씨를 보살피다가 처녀성을 훼손시켰고, 이어서 아들 하나를 만들어놓고 만다. 이후 어린 에스테르는 시골이라 마땅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질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먹고 살기 위해 대부분 농민으로 구성된 마을의 모든 남자에게 몸을 팔아 돈이면 돈, 양식이면 양식을 얻어, 마을에서 벗어난 공동묘지 입구에 작은 움집을 짓고 살아왔다. 에스테르가 낳은 상도르의 아들, 토비아스 호르바츠. 나이가 차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보니, 가끔 집에 찾아오던 아저씨가 담임선생일 줄이야. 게다가 옆자리에 앉은 같은 학년의 꼬마 아가씨 카롤린. 카롤린이 말한다. 너는 우리 오빠의 옷과 신발을 신고 있구나.
  옷과 신발은 상도르 선생이 입학식 때 입고 가라고 큰 아이가 입던 옷을 물려준 거였다. 카롤린의 아래로 사내아이가 하나 더 있지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미덕이라 훈시를 했고, 아내 역시 남편의 뜻이 합당하다고 여겨 토비아스에게 건네준 것. 그러나 교실에서 토비아스의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책도 없고, 문방구도, 도시락도. 그날 밤 상도르는 다시 토비아스의 집을 방문하고, 엄마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채 한참을 있다가 갔는데,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교과서와 공책을 비롯한 모든 문방구가 다 놓여 있었으며, 이후 카롤린이 넉넉하게 가져온 도시락을 기꺼이 나누어 먹게 된다. 토비아스는 자존심이 상해 먹지 않으려 했지만 도무지 너무 배가 고파 그런 것까지 차릴 여유가 없었단다.
  세월이 흘러 이제 졸업을 해야 할 즈음, 상도르 선생이 토비아스의 집을 다시 찾아 머리가 좋고 똑똑해 성적이 최상급인 토비아스를 상급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돈이 없어도 무료 기숙학교가 있으니 그곳에 보내면 된다고 엄마 에스테르를 설득하려 한다. 에스테르는 상도르가 자식을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고, 토비아스는 이제 일을 해 한 푼이라도 보태야 하는 처지라고 주장해 이에 반대하는 입장. 에스테르가 묻는다.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지요?”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 나는 네 얼굴과 눈과 입과 몸뚱이에 홀렸던 거야. 너 때문에 잠시 눈이 멀었을 뿐이야. 하지만 토비아스는 사랑해. 그 아이는 내 거야. 비록 네 몸에서 나왔지만 이제 더는 너를 참을 수가 없어. 너는 내 젊은 시절의 실수일 뿐 아니라, 내 생애 최대의 오점이야.”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늘 하던 것을 하기 시작한다. 토비아스가 소원하는 단 한 가지. 이곳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다가 죽는 것. 열두 살의 토비아스는 서랍에서 제일 큰, 고기 써는 칼을 꺼내 방으로 들어간다. 그가 그녀 위에 포개진 채 잠을 자고 있다. 달 밝은 밤이었다. 토비아스는 팔을 번쩍 들고 상도르의 등을 향해, 있는 힘껏 칼을 찔러 넣었다. 큰 칼이 그의 몸을 통과해 엄마의 몸뚱이까지 찌를 수 있도록 죽을힘을 다해. 그리고 집을 나서 서쪽으로, 다른 나라들이 있다고 배운 서쪽을 향해 하염없이 걸어가면서, 우리말로 번역한 원고가 겨우 사백 장에 불과한 중편 소설의 막이 올라간다.
  이렇게 동시에 부모살해를 꿈꾸고 실행하고, 유랑에 나서는 이십 세기의 저주받은 오레스테스, 토비아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새로이 상도르 레스테르라는 이름으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음속의 한 여인 ‘린’을 그려놓고 권태와 나태와 싫증과 죽음의 유혹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워나간다. 망명지에서 외국어로 쓰인 작품을 시도하며 언젠가는 책 한 권을 내겠다는 최소한의 희망으로 숨을 이어가고 있다. 망명한 동포들은 이곳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음을 맞고, 욕조에서 동맥을 끊기도 하고, 유서로 ‘너희들은 내 똥이나 먹어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을 매달고, 가스밸브를 열고 머리통을 오븐에 밀어 넣은 채 죽어가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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