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있나이다 1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68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그래도 워낙 재미있어 나흘이면 다 읽고 독후감 쓰고, 쐬주 한 병 마시고 입가심으로 맥주도 한 캔 딸 수 있다. 포어가 쓴 픽션 작품이 오늘까지 모두 네 편이라고 위키피디어에 나와 있는데, 민음사가 우리말로 세 편을 출간했고, 이 책으로 그의 우리말 번역본 소설을 몽땅 읽은 셈이다. 데뷔 이후 출간 순으로 하면 <모든 것이 밝혀졌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읽은 순서로는 2-1-3.
  앞에 읽은 책들을 통해 이미 포어의 입심에 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었으나, <엄청나게...> 이후 11년 만의 작품으로 11년 동안 자신의 입담을 더욱 빛나게 절차탁마하여 이젠 거의 포르노 수준의 짧은 묘사를 마구 구사하면서도, 더할 수 없는 미국적 농담이 범지구적 가정, 가족, 결혼생활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었다. 웃기지? 포르노 수준의 묘사와 미국적 농담이라면서 지극히 보수적인 극동 아시아의 가정과 결혼생활에서도 그대로 통할 수 있는 교훈이라니. 글쎄 그렇다니까.
  이 책 역시 유대인 가족 이야기다. 첫 번째 작품인 <모든 것이....>에서와 같이 유럽에서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폴란드 유대인 가정이 나치의 침략을 맞아 두 형제만 피신시킨 채 몰살을 당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그중 한 명은 이스라엘로, 다른 한 명인 아이작은 성姓을 미국식으로 ‘블록’이라 개명해 아메리카로 향한다. 작 중 아이작은 증손자 샘이 열세 살을 맞아 성인식, 이걸 ‘바르 미츠바’라고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유대 행사인 증손자의 바르 미츠바가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이스라엘의 파괴가 시작 되었을 때 자살할지 유대인 요양원으로 옮길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늙은 몸이라도 자기 집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밥을 지어 먹는 것도, 라면 한 봉 끓이는 것도 쉽지 않고, 용변을 보려 화장실 가는 건 산소통 없이 캉첸중가에 오르는 것만큼 숨이 차고, 심지어 건조한 등을 긁기 위해 효자손을 들어 올리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 더 연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파괴라고? 그렇다. 이스라엘 서안지역에 강한 지진이 발생해 이스라엘의 일부가 조금 파괴되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팔레스타인은 훨씬 더 처참하게 파괴되어, 부상을 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치료를 위해 병원이 있는 이스라엘로 몰려들어, 원주민들과 다툼이 있었고 이게 과열되어 이슬람 국가들과 이스라엘이 전시상태에 접어든 것을 말하는데, 염병을, 이스라엘이 이슬람하고 대가리 박고 싸움질 한 것이 한 두 번이어야 알지, 내 아무리 검색해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작품의 줄거리로 짐작하자면 2006년가량 되어야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어서.
  그럼 증손자 샘의 성인식, 바르 미츠바는? 샘이 유대학교에 다니는데, 그의 책상에서 인종차별적 내용이 담긴 메모를 발견한 교장이자 랍비 선생이 엄마 줄리아와 아빠 제이컵을 소환해 말씀을 하시기를, 우리 민족 스스로가 끔찍한 인종차별로 인해 수백만 명이 희생당했으면서도 피부색이나 다른 이유로 다른 인종을 차별한다는 건 말로 되지 않으며, 심지어 샘이 쓴 메모에는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깜”뭐라뭐라 하는 단어까지 있어서 도무지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아, 자신이 한 행동을 교사와 학생 전체에 사과하지 않으면 일정 기간 정학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바르 미츠바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부모가 샘에게 묻기를, 이거 네가 한 거야? 샘이 답하기를, 아냐, 내가 한 거 아니예요! 아빠 제이컵이 보기에 분명 샘의 필적이 맞다. 그럼에도 아들이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하니 그건 아들이 한 짓이 아닐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엄마 줄리아는 맏아들 샘의 필적이 틀림없는 만큼 이건 분명히 샘이 한 짓이다, 라고 하고.
  좋다. 인물 탐구를 심화시켜보자. 증조부, 증손자까지 했지. 그럼 샘의 부모.
  때가 2000년에서 2010년 사이. 대강 2005년이라고 치자. 이때도 스마트 폰이 있었나? 있었다고 치자. 아빠 제이컵이 스마트 폰을 하나 장만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한 명 빼고. 유난히 눈치가 재고 조숙한 샘. 얘가 ‘저기 저기 저, 구석 끝자리’에 숨겨놓은 스마트 폰을 발견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아빠가 지정해놓은 암호를 단 몇 번의 시도 끝에 풀어낸 다음 아빠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국 여자와 사이에 오간 하드 코어 포르노 수준의 문자를 발견하고, 아 우리 아빠가 바람을 피우려 스마트 폰을 사서 혼자만 몰래 보시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려는 순간 갑자기 엄마가 들이닥쳐 문제의 스마트 폰을 변기 구석에 허겁지겁 숨겨놓고 만다. (얼마나 야한 문자인지 차마 여기다 옮기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데 아니나 달라, 엄마의 눈에 함부로 숨겨져 있는 스마트 폰이 띄고, 이 방면에 도가 튼 샘을 호출해서 문자를 읽게 된 순간, 정말이라니까, 하도 음란해 당신더러 이 책을 읽어보란 얘기를 못할 수준이라고, 엄마 줄리아의 눈이 휘까닥 뒤집혀버린다.
  당신에게 묻겠다. 노골적이고 완전 변태인 성행위를 서로에게 문자로 해댄 남편이 혼외 연애를 했겠는가, 아닌가. 아내 줄리아는 아니라고 딱 결론을 낸다. 남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서? 남편의, 아니라고, 그냥 문자로만 장난삼아 해본 거라는 변명에 설득당해? 천만의 말씀. 줄리아가 ‘혀’라는 긴 칼을 휘두르며 하시는 말씀은, “당신은 그럴 용기가 없어서 죽어도 못해.” 따옴표의 문장에서 숨겨진 목적어는 당연히 엽기, 포르노, 변태적인 성행위를 일컫는다. 근데 제이컵이 정말 했냐고? 그거야 안 알려주지.
  하여간 이렇게 아들 삼형제가 있는 집안에 급격하게 균열이 생긴다. 십여 년 전 줄리아와 제이컵이 결혼하던 날, 제이컵의 엄마가 하신 말씀 중에 명언이 있었다.
  “병들 때나 병들 때나, 그게 내가 너희에게 내가 바라는 거란다. 기적을 찾거나 기대하지 마. 기적 같은 건 없어. 더는 없단다. 그리고 가장 아픈 상처에 쓸 치료제도 없어. 서로의 고통을 믿고 그것을 위해 있어주는 것만이 약이란다.” (‘병들 때’가 두 번 연속으로 씌어있다.)
  여기다가 우여곡절 끝에 바르 미츠바를 끝냈으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성년이 되지 않겠다고 주장한 샘은 자신의 바르 미츠바 연설에서 유대 캠프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누구에게나 원자폭탄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걸 꼭 터뜨리라는 건 아니라고 설파하기도 한다.
  이 원자폭탄은 여러 의미가 있다. 이혼이라는 가정의 폭파를 뜻하기도 하고,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핵전쟁을 뜻할 수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하자. 이 책을 당신에게 권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앞에서 강조한, 어쩌면 그렇게 재미난 장면도 나오니 참고하라고 유혹할 의도도 있었는지 모른 하드코어 포르노 수준의 일부 묘사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있었던 이스라엘과 이슬람 사이의 다툼을, 지독스럽고도 당연하게, 책이 끝날 때까지, 유대인의 편에 서서 발언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동감하면서 읽을 줄 모르지만, 솔직하게 말해 난 역겨웠다.
  이 정도면 이야기 다 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재미있고 유쾌하기도 한) 미국식 유머, 디아스포라의 종막에 선 이스라엘과 미국에 자리를 잡은 유대인의 갈등, 한 가정에 깃든 이별의 그림자, 성인식 바르 미츠바, 그리고 과한 이스라엘과 이슬람 간의 전쟁 이야기. 매력적인 작가이지만 언제나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다. 그래도 이이가 다음 작품을 내면 꼭 읽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