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소설
양선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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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개의 단편소설을 실은 단편선. 2014년부터 2017년에 걸쳐 각종 잡지에 실린 작품들을 뽑은 책인데, 작가가 1990년생이니 만 24세부터 27세까지, 가장 혈기왕성하고 의욕적이며 반면에 일생 중 가장 미친 듯하면서도 아직 설익은 상태일 때 썼을 것이다. ‘설익다’는 것은 욕이 아니다. 그만큼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고, 사실 또 남자들이 철이 늦게 드는 편이니.
 양선형. 이 작가의 이름은 기억해두어야겠다. 왜 젊고 젊은 시절에 이런 소설방식을 택해 글을 쓰게 됐을까. 열 편의 작품이 모두 뇌 안에서의 화학작용에 의존하여 쓴 것처럼 보인다.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작품을 이해하고 말고는 다음으로 하고, 읽어가기가 쉽지 않다. 첫 번째 실린 <해변생활자>는 이이의 데뷔작으로 2014년 『문장웹진』에 실렸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 주인공은 해변에서 금속탐지기를 백사장에 꽂아 동전이나 시계, 귀금속 등을 찾아 챙기는 회사의 직원이며, 두 번째 작품 <스나크 사냥>은 ‘시설’의 내부에 살고 있는 날짐승과 길짐승을 총칭해 부르는 ‘스나크’들을 사냥해 와 햄버거 등의 패치로 팔아넘기는 것처럼 보이는 스나크 사냥꾼이다. 그런데 진짜로 읽어보면 이들이 정말 동전을 찾고 있거나 스나크를 사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저 작가의 허황한 상상 속의 일인지 독자의 뇌가 마구 헝클어져버리고 마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런 낯선 글쓰기를 읽는 행위는 첫 작품에서 경보가 울리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경종소리가 만발한 가운데, 젊은 작가 특유의 아직 세공되지 않은 거칠고 비위생적인 표현이 적나라해서 더 이상은 읽어주지를 못하겠다 싶은 위기상황을 맞다가, 세 번째 단편 <생활과 L의 유령>에 오면 그런 건 작가의 작품에서만 읽을 수 있는 특징으로 인정하면서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단계로 접어든다.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 왜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됐을까. 지방 대도시 출신의 1990년생이면, 적어도 열 살부터 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삶은 컴퓨터/인터넷 게임이란 큰 틀 안에서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형화, 디지털 화한 드라이한 성장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자연보다는 인공, 직접 체험보다는 허구적이고 폭력적인 상상 체험을 경험했으리라.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비밀은 언제나 사실을 압도”하고, “서술敍述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확신이란 늘 현상보다 늦게 찾아오는 법”이 된다. 책 전반에 걸쳐 특히 ‘서술’에 관해 작가의 초점이 맞춰지는 일이 많다. 위에 인용한 “서술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읽으며 나는 상당히 정확한 포착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작가가 주장해왔던 것(서술이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면 서술을 하는 작가의 실력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문장일 수도 있으나, 예를 들어 표정이 없는 명함판 사진을 보고 해당인물에 대하여 아무리 현미경적 서술을 시도해봤자 인물이 사진을 찍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기에 나는 양선형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이없는 환상이나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쓰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오직 상상, 공상, 망상 속에서만 잔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해 까마귀가 눈알까지 파먹은 다음인데도 다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으로 등장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뭐 물론 당연히 엽기이긴 하다. 게다가 양선형의 작품 몇 개는 묘사가 위생적으로 말해 더럽거나, 잔혹한 화면이 떠올라 팍 책을 덮을 생각까지 하게 만들기까지 하니 엽기는 엽기고,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것처럼 마음 약한 나는 이런 거 싫어해서 읽기가 퍽 곤란했다.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경험은 했으되 그것을 확대 변주하며 오직 뇌 안에서 새로이 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작품 속에 생활이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 작가로서의 생명은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가 그랬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 2017년 작품 둘, <감상 소설>과 <현상 소설>에 접어들면 당연히 정상적 삶을 노래하지는 않지만 작품의 틀은 상당히 보통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감상 소설>에서는 보위부에 의하여 B급 내란 음모 혐의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퇴락한 교도소에서 출감한 정치범, <현상 소설>에서는 퇴락한 바닷가 펜션에 놀러와 하룻밤 만족스러운 사랑을 나눈 젊은 여자와 남자. 물론 마지막까지도 양선형은 사람, 등장인물들이 진짜로 행위한 내용이 아니라 등장인물 또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만발하게 피어난 상상/환상/환각 속 행위가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렇게 작가는 조금씩 변해가리라. 그리하여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세련된 한 장르를 만들어내 이이를 추종하는 한 무리의 후배들이 생겨날지 누가 알리. 언젠가는. 어쩌면.
 작가의 나이 이제 서른. 앞으로 무궁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거 하나로도 정말 질투할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작가 본인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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