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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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가 2014년 스스로 선정한 대표 단편 스물세 편을 골라 <오에 겐자부로 자선단편>이란 책을 내, 이것을 현대문학사가 한글로 번역 출판한 책.
 겐자부로는 자신의 작업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각 8편, 11편, 4편을 담았다. 본문만 710 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인데, 이 가운데 오직 하나, 초기작 18쪽 분량의 <돌연한 벙어리> 한 편만 3인칭 시점으로 썼을 뿐, 나머지 스물두 편은 전부 일인칭 소설이다. 3인칭 소설도 그의 고향 시코쿠 산골을 무대로 패전 후 갑자기 들이닥친 미군병사 몇 명과 위압적인 통역관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각이다. 그나마 그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읽어온 독자들은 겐자부로의 아버지가 작가가 소년시절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비록 죽음의 방법은 다를지언정 ‘소년’의 아버지의 죽음이 스토리의 전환점이 되는 바, 거의 일인칭 소설 비슷하게 읽힐 것이다.
 일련의 작품 가운데 신선하게 읽은 것은 초기, 그러니까 등장인물이 도쿄대학 불문과에 진학하여 도쿄대 의과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었던 일화를 다룬 작품들이었다. 그 외의 단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이미 작가의 다른 장편소설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라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번역본을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겐자부로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작품은 크게, ① 아버지의 죽음, ② 고향 시코쿠 근방에 있었던 민란民亂, 그리고 ③ 뇌 헤르메스로 태어난 줄 알았지만 수술을 통해 생명을 구한 지적장애인 아들 히카리와 관련한 삶의 고단함 정도로 거칠게 셋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직접 고른 평생의 단편 작업 스물세 편에는 ①과 ②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도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래도 실제 삶의 곁에 늘 있어서 쉴 새 없이 자신에게 간섭해 온 지적장애 아들에 관한 것이 가장 컸으리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큰아들 히카리 또는 이요(히카리의 애칭)가 등장하는 작품이 전체 710쪽 가운데 482쪽, 편수로 23편 중에서 16편에 이른다는 점. 그의 초기 장편 <개인적인 체험>에서 뇌 헤르메스가 거의 틀림없다고 착각한 ‘나’가 방황하며 옛 연인에게 의지해 위스키와 수면제 두 알을 상습적으로 먹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바로 옛 연인, 연인이 아니더라도 전에 접촉을 해본 적이 있는 그 여자가 단편집에서도 몇 번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반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며 독일에 살면서 일본에 대학을 다니러 체류하는 설정이다. 초기작으로 분류한 것들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공중 괴물 아구이>에서 시작해 마지막까지 모든 작품이 다 주제로 다루지는 않았더라도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나, 사춘기를 거쳐, 청년기, 장년기까지 온 아들이 매우 중요한 기재로 작용한다. 중기 작품 가운데 두 단편으로 구성한 <조용한 생활>의 경우만 유일하게 작가의 딸이자 히카리의 여동생 시각의 일인칭 소설인데, 그것도 포함하여 전편에 걸쳐 작가에게 또는 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히카리의 남은 생을 책임지는가 하는 두려움인 듯 보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과한 사소설 경향이, 그래서 좀 질린다는 뜻.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은, 방금 얘기했듯 조금 질리는 면이 있긴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를 알기 위한 좋은 기획이란 점에 적극 동의하는데, 이 책은 맬컴 라우리의 소설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먼저 읽은 다음에 손에 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행히 라우리의 <화산 아래서>를 읽었고, 불행히 블레이크의 시는 단 한 수도 읊어본 적 없어서 그나마 50점은 됐다. 중기 작품들엔 이 두 작가를 자주 인용하는 바람에 내 경우엔 블레이크 시만 나오면 멀미가 나는 증세를 멈추지 못했다.
 책에 좋은 말들이 많이 나온다. 아시다시피 오에 겐자부로는 평생 반핵운동과 반독재 주장을 펼친 일본의 대표 양심적 지식인이어서, 비록 그가 직접적으로 반핵, 반독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몰라도 작품 속에는 분명하게 그의 생각을 밝히길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런 표현을 보자.
 “‘광기’ 없이는 위대한 사업은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광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업은 반드시 황폐함과 희생을 동반합니다. 진실로 위대한 사업은 인간이란 ‘광기’에 사로잡히기 쉬운 존재임을 남보다 깊이 자각한 인간적인 사람에 의해 성실하고 집요하며 착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류의 불행한 역사는 모두 이 ‘광기’에 의하여 저질러졌지 않은가. 20세기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도, 제3제국에서 자행된 폭압과 전제정권도, 소비에트와 주변국의 절대 권력도.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 할지라도 나날이 늙어 허약해지는 가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게 인간의 진짜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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