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진짜라면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1
사예신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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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나라에나 다 있지만 유독 중국에서 ‘사회활동’을 하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으로 ‘꽌시’라는 게 있다고 들었다. 꽌시가 뭔고 하니 한자어로 ‘관계關係’를 의미하는 바,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줄’ 또는 ‘배경’, 소위 ‘백그라운드back ground'와 비슷하다. 뭐 우리나라도 크게 다른 바 없어서 요새 밝혀진 것 가운데 꽌시가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놀랄만한 성과 하나를 대자면, 딱 두 주 연구에 참여한 고2 학생이 권위 있는 논문의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일 같은 거. 이 독후감을 쓰고 있는 시간이 2019년 9월 1일. 2019년 늦여름을 달구고 초가을마저 노랗게 물들일 거 같은 화제의 인물이 형조판서에 올랐는지, 미역국을 자셨는지 결판이 안 났지만, 그이의 따님도 부모 가운데 누군가의 ’꽌시‘가 없었다면 고등학생이 2주 만에 논문의 제1저자가 되는, 십육 세에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법대에 입학한 당대의 수재 아빠를 닮아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중국에서 하찮은 장사를 하던 내 형이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다못해 자기처럼 정말 사소한 사업의 경우에도 이 꽌시가 없으면 참 힘이 든다고 했을 정도니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이 드라마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한 젊은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중앙의 높은 간부의 자제를 사칭하는 주인공에 접근해 꽌시를 만들려는 지방 공무원들의 구태를 희화화하고 있다. 첫 장면은 고골의 연극 <검찰관>을 관람하기 위해 빼곡하게 들어찬 극장 무대에서 단장이 등장해 연극을 시작해야 하지만 VIP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공연을 잠시 미루게 된 것을 양해해달라고 다중의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VIP가 입장하고 바로 뒤를 이어 VVIP가 등장해 드디어 막이 오르는 순간 수 명의 공안이 객석에 들어와 문제의 VVIP이자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문화혁명의 잔재인 하방 중인 지식청년이자, 한 여자를 임신시킨 리샤오장을 사기혐의로 체포해버린다. 먼저 결론을 내리고 이에 대한 과정을 보여주는 연극.
 책 뒤의 해설을 보면 작품 자체가 고골의 <감찰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해설을 보지 않더라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착한 흘레스타코프를 감찰관으로 오해한 지역 유지들이 만드는 블랙코미디가 <감찰관>. 마치 뭔가 있는 듯 거들먹거리는 리샤오장을 중앙 권력자의 막내아들로 자기들 마음대로 단정하고 이를 굳이 부인하지 않은 채 그들이 베푸는 호의를 즐기는 청년이 흘레스타코프를 빼박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감찰관>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 이에 대한 예우로 사예신이 선택한 건 작품 속에서 절찬리에 공연하고 있는 연극 작품을 고골의 <감찰관>으로 정했을 것이다. 그래 리샤오장은 ‘장샤오리’라는 가명으로 기꺼이 사기꾼이 되기로 결심을 해 본격적인 사기행각에 나서는데, 이건 모두 임신한 애인 저우밍화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저우밍화의 아버지가 아직도 지방 농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식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어느 정도인가 하면 중국에서도 뇌물용으로 쓰거나,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 기념 만찬용으로나 쓰이는 최고급 마오타이 술 선물도 다시 돌려주어버렸으니 노인네 고집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게다가 꽌시를 만들려는 지방 공무원은 한술 더 떠, 리샤오장에게 접근해 허위서류를 만드는 법, 거짓으로 말을 만드는 법까지 리샤오장에게 훈수를 두는데, 이런 모습이 읽는 독자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으니, 아직은 (굳이 포퍼의 의견을 따르지 않더라도) 열린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20세기 중국에서 이렇게 정부 공무원들을 비난해도 극작가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 그랬더니, 아니나 달라, 후반부로 접어드니 리샤오장이 자기 아빠라고 거짓말을 해댄 최고 간부 장 위원이 갑자기 베이징에서 현장을 방문해 20년 만에 지역 시의 대표 우 위원장을 만나 리샤오장의 사기행각이 백일하에 밝혀지고 급기야 앞에서처럼 체포된다. 리샤오장은 자기의 거짓 아빠 장 위원을 변호사로 위임한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진짜다. 읽어보시라.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1979년 9월. 덩샤오핑이 개방정책을 펼치고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으로 아직 문화혁명의 잔재가 완전하게 벗겨지지는 않은 정서 위에, 마음속엔 아직도 홍위병의 엄혹 살벌함이 생생했던가. 제1 저자 사예신 외 2명은 또 한 편의 재미있는 블랙코미디가 될 뻔한 작품을 결국 계몽주의적 연극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어쩌랴,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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