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기 중국전통희곡총서 2
사천성천극원 지음, 임미주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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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수유기’, 어려운 한자 유襦가 섞여 있어 굳이 옥편을 찾아봐야 했다. 유襦는 저고리 유자다. 그러니 수유는 저고리에 수를 놓는 이야기라는 뜻.
 드디어 본문 1막에 들어서면 2012년 부산연극제에서 <수유기> 공연 사진이 보이고 대갓집 아드님 정원화가 기녀 이아선과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정원화의 아버지는 덕망을 중시하는 관리고, 어머니는 자상한 안방마님이다. 1막에서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2막에 접어들면 정원화. 이 아이는 지방귀족 출신으로 나름대로 문벌이 화려한 집안의 외동아들이며, 장안에서 3년마다 열리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출발했으나, 고대 중국 내륙의 교통중심지로 문물이 발달한 양주에 잠깐 머물다가 그만 아름다운 얼굴, 빼어난 몸매와 따뜻하지만 굳은 마음을 가진 기녀 이아선과 엮여 신세를 망친 철부지다. 엄한 아버지가 무려 천금의 돈을 내려 과거 시험을 보고오너라 했더니 ① 천한 기녀한테 엎어지고, ② 돈은 돈대로 집사 나도덕羅道德이 홀랑 삼켜버리고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이아선으로 말할 거 같으면 본래부터 기녀는 아니었지만 없는 집구석에 갑자기 아버지가 숟가락 놓는 바람에 장례나마 번듯하게 치러 남부럽지 않게 저승길 보내기 위해 스스로 몸을 팔아 장례비용을 댄 효녀란다. 그런 일이 당시 기준으로 효녀였나 보다. 따따부따 하지 말자. 그런데, 이제 돈도 없고, 집도 없어져버린 정원화는 어떻게 되었겠나. 이아선의 뜻과는 상관없이 냉혹한 기생어멈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진짜 거지신세로 떨어진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딱 이 때를 잡아 정원화의 아버지 정북해가 공무로 출장을 왔다가 복귀하던 중 양주를 들르게 된다. 양주가 교통의 중심지니까 충분히 그럴 듯하다. 그래 부자가 곡강에서 만나 반가움을 표한 다음 어째 이렇게 거지꼴이 됐는지를 따지던 중, 정원화는 처음엔 도적을 만나 돈과 말을 다 뺏겼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다음엔 나도덕이가 훔쳐 달아났다고 하는 바람에 눈치를 챈 아버지에게 이실직고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굵은 몽둥이로 숨이 아슬아슬 멈추기 전까지 두드려 맞는다. 이 장소가 곡강曲江.
 아하! 딱 눈치 챘다. 이거 전에 읽어본 작품이다. 그때 제목이 뭔가 하면, 석군보의 잡극 “곡강지의 꽃놀이 李亞仙花酒曲江池”.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시리즈 78번 <원잡극선>에 실려 있다. 같은 내용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글공부 하는 총각과 기녀 사이의 로맨스 극인 것, 장소가 곡강을 옆에 둔 양주인 것은 맞다. 흠. 그렇군. 남송 시대 남중국 지역인 사천성 지역의 천극이 나중에 원나라 시대 원곡의 대표작이 되는 것이로구나.
 여기까지 얘기해도 대강 드라마의 내용은 짐작하시리라. 한 가지, 제목이 왜 수유기, 저고리에 수를 놓는, 저고리에 바느질하는 이야기인지 힌트만 드리지.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작품 <독재자 오이디푸스>를 읽어보면, 아니, 연극이나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오페라를 보면 (오페라는 놀랍게도 소포클레스의 독일어 번역 대본을 그대로 쓴다) 독재자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스스로 멀게 하는 장면이 끔찍스럽게 나온다. 공연기술의 발달로 눈에서 마치 진짜 피가 뚝뚝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들 알고 계시지? 오이디푸스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자기 눈을 찌르는지. 브로치brooch의 핀으로 눈을 콕콕 쑤신다. 심지어 그것도 실황으로 보여준다. 그럼 수유기, 저고리 바느질은 무슨 용도겠습니까? 아, 오늘은 힌트가 너무 노골적이다. 기녀, 과거 시험 치는 서생, 엄한 부모와 가문. 이런 구성도 70년대 한국영화에서 무지하게 많이 봤다. 룸살롱 호스티스와 사법고시생. 다행스러운 건 남송시대에 이 장르는 해피엔드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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