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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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느 세실 데클로스라는 프랑스 소설가가 있었는데, 주로 ‘도미니크 오리’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쓰다가 1954년에 ‘폴린 레아주’라고 다른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 1954년. 프랑스 문학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폴린 에라주라는 여성이 발표한 <O 이야기> 하나로 발칵 뒤집혀진다. 왜냐하면 정말로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여태 살면서 야한 작품 깨나 읽어본 내가 읽어도 쇼킹할 정도의 외설적 표현과 가학과 피학적 성도착 장면을 시종여일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폴린 레아주는 젊은 프랑스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되 마고 상’을 수상하기까지 이른다. 누가 썼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작품.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나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정도는 이 책에 비하면 ‘이도 안 난 수준’이며 억지로 가져다 붙인다면 지저분한 분뇨 이야기를 '뺀' 사드 후작 정도나 가능할 정도의 쇼킹한 성애장면이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하여 쓰였고, 괜찮은 상까지 받은 것도 모자라, 공전의 히트를 거두는 베스트셀러가 됐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을 필두로 거의 모든 백인들은 폴린 레아주라는 사람이 이름만 여성이지 사실은 앙드레 말로나 레몽 크노일 거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고 한다. 도대체 진짜 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난 세월이 40년. 87세에 접어든 안느 세실 데클로스, 일반적으로 도미니크 오리라고 알려진 노파가 세상을 접기 불과 4년 전에, <O 이야기>를 쓴 작가가 자신이라고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오랜 의문이 벗겨진다.
 벗겨진다? 그렇다. 벗겨졌다.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도 ‘벗기다’와 ‘벗다’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건, 설마 이 정도로 야한 책이란 건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어느 책 속의 등장인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O 이야기>를 찔끔찔끔 읽는 장면이 재미있어서였다. 오호, 그렇게 재미있어? 서슴지 않고 책을 검색했더니 ‘19세 인증’이 뜬다. 확 구미가 당겼다는 걸 고백한다. 얼른 휴대폰 인증하고 독자서평, 출판사 책 소개, 이런 것들 함부로 읽는 것이 책을 진짜로 재미있게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구입했다. 야하다. 21세기도 벌써 20% 정도 지나간 시점에 읽어도 그렇다. 총 4부로 되어 있는데, 3부에서는 비위가 좀 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드의 책처럼 장면이 하도 더러워 그런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신체 훼손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원래 그런 종류를 견디지 못해서 그랬다.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이 알파벳 ‘O'.
 어떤 여자인지, 원래 어떤 여자였는지 책의 134쪽에 설명이 되어 있다.
 “예전에 그녀는 늘 쿨하고 활기찼으며, 자기한테 반하는 사내들 마음을 말 한마디 제스처 하나로 후리는 데 재미를 느끼는 아가씨였다. 절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법이 없었고, 그저 극진한 정성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장난삼아 한 번씩 몸을 허락하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달뜬 열정에는 더욱 불을 지펴 가혹한 희생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타입의 여자였던 것이다.”
 책의 줄거리는 이렇게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있고 지배성향까지 있는 여인이 말 그대로 성노예가 되는 과정이다. O는 자신에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채찍질하고, 성적으로 학대하고, 그가 있는 장소에서 낯선 사내(들)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그를 향한 ‘사랑’이라고 오해한다.
 “르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해…… 나를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나를 버리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나를 버리지마……” (133쪽)
 심지어 사랑하는 르네가 피가 섞이지 않은 이복형제 스티븐 경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넘겨 상당한 수준의 성적 학대를 당하게 하는 것도 처음엔 르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렇도록 사랑했던 르네를 그리 쉽게, 짧은 시기에 잊고 새로이 스티븐 경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인 줄 안다. O가 바보냐고?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그리도 오만하고 매사에 자신감에 차있고 남자를 지배할 줄도 아는 여성 O가 ‘루아시’라는 장소에서 지독한 마조히즘적 단련을 받아 그렇게 변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첫 장면, 르네와 함께 택시를 타고 루아시까지 갈 때부터 마지막 장면, 두 명의 남자가 번갈아 O를 차지하는 장면까지 한 번도 독자는 O의 원래 모습이 똑 부러지고, 독립적인 여자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수시로 채찍질을 당하는 루아시에서의 성적 단련 장면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샤토 루즈>가 떠올랐다. 결혼을 했지만 부부간 성적 접촉은 서너 번에 불과한 부부. 섹스는커녕 깊은 애무도 거부하는 아내를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에 있는 성城 샤토 루즈Château Rouge에 있다는 성性 능력 개발센터에 보내는 소설. 그 책에서는 아내에게 성적 흥분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는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훈련 장면이 등장한다. 와타나베의 (이 책에 비하면) 조금밖에 외설적이지 않은 책 속에서는 가학, 피학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간질간질한 섬세한 자극이 꽉 차 있어서, 야하지만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O 이야기>는 내 수준에 과했다.
 역자 성귀수는 후기에서
 “일개 에로틱한 내용의 소설이라는 것만으로는 정의가 턱없이 부족하다. 예컨대, 이 책속에 난무하는 사도-마조히즘적 담론들은 단순히 성적 쾌락의 수행으로 읽히기보다는 어떤 극한의 추구, 절대를 향한 자아의 완전한 헌정(獻呈) 의지로 해석된다. 마치 노예처럼, 용해되는 원소처럼 연인이라는 존재에, 사랑 자체에 완전히 속해 버리고자 하는 작가의, 아니 O의 연애편지……”
 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남자들의 권력으로 특정한 여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성 노예를 통해 오직 성적 쾌락만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비인간적 유희를 미화해버렸다.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에 의하여 쓰인 가장 극명한 안티-페미니즘 소설이며, 반인륜적 작품이다. 남자가 읽기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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