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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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0쪽에 모두 53편의 단편 소설을 실었다. 나는 그린의 책과 상당히 늦게 만났다. 당연히 <권력과 영광>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 번역에 관해 논란이 많아 그렇게 됐다. 유명 소설가가 한 번역이었다. 난 소설가의 번역을 될 수 있으면 피하는 편이다. 우리말을 과하게 잘해 원문을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는 대신 문맥만 파악해 옮겨놓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것들 모두 소설가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윤문으로 무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더는 미룰 수 없어 읽어봤더니 그렇게 재미날 수 없더라는 거. 그렇다고 <권력과 영광>을 추천하지는 않겠다. 오역 여부에 관한 논란이 여전하고, 중쇄를 찍었음에도 (확인한 바는 없지만) 개전의 정이 없다고 한다. 읽으실 분만 읽어보시라.
 하여간 그래서 그레이엄 그린을 알게 됐다가, 이제 지난 주 월, 화, 수요일, 삼일에 걸쳐 930쪽에 달하는 53편의 단편집을 읽었다. 네 권의 단편선집과 미발표 단편 네 편을 묶어 2005년 펭귄북스에서 발매한 <그레이엄 그린 단편 전집>을 번역했다고 한다.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은 여성 아니면 쓸 수 없는 아릿한 작품들로 구성됐다고 하면, 이 책은 남성만 쓸 수 있는 선 굵은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1부 “21가지 이야기”는 1929년부터 54년까지 작품을 쓴 역순으로 꾸며져 있다. 글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준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린 역시 첫 작품부터 빼어나지는 않았다. 아,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그레이엄 그린이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이야기 하려고 한다. 작품마다 명작을 뽑아내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는가. 소수의 범작, 졸작도 있는 게 정상이지.
 책을 펼치면 54년에 최초 출간한 책 “21가지 이야기”의 첫 작품 ‘파괴자들’이 나오는데 처음 두 문장이 이렇다.
 “가장 최근에 입단한 신참이 ‘윔즐리코먼 갱단’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8월 공휴일 전날 밤이었다. 마이크 말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문장 뒤에 같은 문단이지만 딱 맞춰 줄이 바뀌며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나 아홉 살인 마이크는 무슨 일에나 놀랐다.”
 흠. 그레이엄 그린이 누군가. 영화 <제3의 사나이>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먹고, <오리엔트 특급>의 원작도 쓴 장르문학의 큰 별이다. 위의 처음 두 문장으로 비슷한 추리, 첩보, 범죄 등을 기대했다가 아이고, 아홉 살? 동네 악동들이 만든 갱단이 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조금 속은 기분. 정말? 정말. 그러다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조금씩 독자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열 살 내외의 악동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집단 폭력성과 파괴성. 그러면서 늙어 거의 완벽하게 무력한 피해자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하는 말이 이렇다.
 “죄송해요. 웃음이 터져 나오는걸 참을 수 없어요, 토머스 씨.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하지만 이건 우스운 일이라는 걸 인정하셔야 해요.”
 몇 명의 소년들이 완전히 ‘재미삼아’ 약자인 동네 노인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이렇게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그린은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범죄성향을 신랄하게 그려낸다. 이것으로 소년들에 의한 폭력을 다룬 단편 <파괴자들>은 5년 전에 쓴 <제3의 사나이>의 주인공 해리 라임이 관람차 위에 올라 까마득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무수한 점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다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겠나.”라는 대사와 연결이 되는 거 아닐까. 약한 것을 보면 괴롭히는 장난. 다들 어릴 때 해보셨을 거다. 파리를 잡아 날개를 떼고 놔주는 행위. 이게 사람의 본성이고, 그걸 문자를 통해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작가란 사람의 직업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심리소설이다. 유럽인 부부가 더운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뭔가 새로운 자극을 찾는 이들. 어떻게 하다 보니 포르노 영화를 틀어주는 조그만 집에 들어가게 됐다. 1950년대 중반이니 외설영화도 구경하기 쉽지는 않았을 터. 영화가 시작하고 여자가 남자의 옷을 벗기는데 어깨의 특별한 점을 발견한 남편. 그는 아내에게 그만 자리를 뜨자고 재촉하고, 여태까지 지루하다고 불평하던 아내는 남편이 그럴수록 오히려 더 보자고 고집을 피우다, 포르노의 주인공 남자가 바로 옆에 앉은 남편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는 걸 알고 경악한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의 거의 대부분은 심리소설이다. 심리는 심리인데 남자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심리. 그래서 혹시 여성이 읽으면 남성에 의하여 왜곡된 여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쉰 세 편의 단편소설을 읽어 제목과 내용이 막 섞여 떠오른다. 그럼에도 좋았던 작품 세 개만 대보라면, <정원 아래서>, <남편 좀 빌려도 돼요?>와 <8월에는 저렴하다>를 꼽겠다. <정원 아래서>는 문예출판사에서 찍은 『제3의 사나이』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이 책에도 있다는 걸 알고 당시엔 읽지 않았었다. 단편소설들이라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무려 쉰 세 편에서 고른 딱 세 작품에 관해서라면.
 내가 책 읽는 방법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랴, 난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어치워야 속이 개운해지는 스타일인 걸. 그럼에도, 역시 단편집은, 특별히 현대문학에서 내고 있는 ‘세계문학 단편선’ 같은 두꺼운 단편집은 넉넉하게 날짜를 잡고 한 번에 한두 편씩 꼭꼭 씹어가며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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