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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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라면 역자의 작품해설 일부를 감안하는 것이 좋다. “공포가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쓴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는 “알바니아 근대사 가운데 여전히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건을 다루었다. 즉 알바니아의 공산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메메트 셰후가 1981년 12월 14일 새벽에 총에 맞은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공식적인 발표는 신경쇠약으로 인한 자살이었지만 그 후 이 죽음을 둘러싸고 무수한 소문과 의혹이 나돌았으며, 사건이 있은 뒤 이십육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알바니아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진 지 십육 년이 지난 오늘날(2008년)까지도 그 비밀은 풀리지 않고 있다”라고 밝힌다. 간략하게 말해, 유구한 역사 기록 동안 자기 나라 땅에서 벌어진 남들끼리의 전쟁에 시달리던 알바니아라고 하는 가난한 공산주의 나라에서 1981년 연말에 막강한 권력을 쥔 차기 공산당 서기장, 현 서기장의 공식적 후계자가 자택에서 자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게 자살인지 타살인지, 자살이건 타살이건 간에 무엇이 후계자로 하여금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의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걸, 이스마일 카다레가 소설로 형상화했다는 거다. 이 말만 딱 들으면 독자들은 이 작품이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천만의 말씀. 우리나라에도 사실 비슷한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번쩍 생각나는 것이 1975년 장준하 실족 사망사건. 알바니아와 한국에서 벌어진 두 사망 사건의 공통점은 무소불위의 독재 철권 시절에 벌어진 죽음이란 것.  우리나라에서 장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는 등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초법적 독재,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던 때였다. 알바니아는 비록 장준하의 죽음 6년 후이긴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공산당 서기장에 의한 1인 장기집권 시절이었으며, 두 체제는 전 국토를 위협과 불안과 공포의 공기 속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설마 민주주의 공화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도? 그렇다. 유신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공포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터. 초등학교 꼬맹이일지라도 반정부적인 말을 하면 누군가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확인하고 발설한 성인을 찾아내, 영장 없이 체포, 긴급조치 위반이란 죄목으로 거침없이 고문하던 시절. 그렇게 붙들려가서 몇 대 두드려 맞고 나오면 다행이지만 때마침 선거가 있거나 시중에 자그마한 혼란이라도 있을 경우엔 졸지에 서울시 모처에 거점을 둔 북파 고정간첩이 되던 때. 내 부모는 유신이 공포되자마자 조금이라도 반정부적 내용이 담긴 대화를 나눌 경우엔 어김없이 일본어로 나지막이 속삭였었다. 비쩍 마른 생물교사가 수업 중에 잡혀가던 시절. 이 때를 이리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런 시절을 무려 근 20년 동안 살아봤기 때문에 이 책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를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해서다. 즉 이 소설은 짐작처럼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 폐쇄되어 불안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난한 독재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 개인들, 개인들의 집단으로 시민들이 마치 기압처럼, 일상적 공포 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완수하면서부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한 세기 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결국 일인 공포정치의 한계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뒷길로 사라졌다. 아직도 굳건하게 대를 이어 왕조를 지키고 있는 특이한 공산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순혈 프롤레타리아라는 우스꽝스러운 신 골품제도를 창조해 모든 인민들을 공포정치 체제 하에서 평등하게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자주 얘기했듯 마르크스의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최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본격적으로 독재에 나서자마자, 국토 위에는 공포의 유령이 배회하고, 사찰하고, 불순분자를 검거하고, 고문하고, 총살해버리기 시작한다. 이런 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니 더 이상 하지 말자. 남은 건 영화 제목처럼 인민들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한 공포와 불안. 심지어 최고 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을 포함해 모든 인민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오해가 쏟아져 신체상, 재산상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여 살 수 밖에 없던 체제. 최고 지도자조차 자기 눈앞에서 아첨하며 충성을 맹세한 수다한 부하 가운데 누가 갑자기 자신에게 총부리를 거두게 될지 불안에 떤다. 이게 독재자의 마지막 발로. 독재자는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단계로는 조금만 더 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해 모든 인민이 태평세월을 맞을 거 같다. 2단계는 일이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3단계는 이제 권력을 놓으면 누군가 자신을 죽일 거 같다. 그래서 살기 위해 권력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단다. 그러니 정점의 단계에 와 있는 독재자는 항상 반역의 기운을 먼저 눈치 채 근본을 없애기 위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의심하고 뿌리를 뽑아야 했겠지. 심복 가운데 심복에 의해 궁정동 안가에서 여가수와 여대생을 불러놓고 스카치를 마시던 농군의 아들의 머리에 권총이 발사될 때까지. 그래 1981년 12월을 살던 알바니아 인민들이 살아가던 사회적 분위기를 1970년대를 살아본 대한민국 국민이, 불행하게도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집단으로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듯했던 시절. 혹시 모른다. 독재 체제라는 것이 정말로 모든 인민들을 공황장애의 상태로 몰아가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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