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말로센 시리즈 1
다니엘 페낙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이이가 쓴 <산문팔이 소녀>를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야기 하나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는 것. 괜찮은 이야기꾼이 있어 자기 머리에서 마구 쏟아지는 거짓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줄줄 흘려내는데, 그 이야기를 읽는(또는 듣는) 재미가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소설책들을 두고 소위 ‘문학성’ 운운하는 건 염병을 하다가 갑자기 땀이 뚝 그칠 말이다(숨이 꼴딱 넘어갔다는 말씀). 현존하는 가장 오랜 소설책이 로마의 네로 시대에 페트로니우스가 썼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설책이 독자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효용이 과연 ‘문학성’일까 아니면 ‘재미’일까. 나는 ‘재미’라는 쪽에 만원 건다.
 내가 전에 읽은 페낙의 <산문팔이 소녀>를 보면 앞부분에 거구의 우락부락한 남자가 출판사 사무실에 난입해 사무집기와 비품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자보 여왕이라 불리는 문학팀 팀장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고, 우리의 뱅자맹 말로센 씨가 등장해, 출판사에 원고를 몇 편이나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해 꼭대기까지 열이 뻗은 남자보다 더 난리굿을 쳐, 책꽂이의 책들을 쏟아내고 책상 위 서류, 집기들을 몽땅 훑어내다가 난데없이 자기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자신의 불운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그를 가라앉게 만든다. 이것이, 이번에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를 읽어보니까, 무대는 출판사가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대형 백화점이지만, 거의 비슷한 직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화난 사람의 (물론 100%는 아니지만) 성질을 가라앉히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인물이다. 백화점 내 맡은 직무는 품질관리 담당. 백화점에서 팔리는 모든 제품에 관한 품질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제품의 불량으로 피해를 입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고객 앞에서 객장 책임자가 (과하게)사납게 말로센 씨에게 불이익을 가함으로써 고객으로 하여금 말로센 씨를 불쌍하게 여겨 보상 규모를 대폭 축소시켜주게 만드는, 일종의 희생양 노릇이다.
 아무리 더러워도 직업을 그만둘 수 없는 건 바로 철없는 엄마 때문. 엄마의 취미는 아이 낳기. 열다섯 살도 되지 않아 첫사랑의 아이를 배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우리의 뱅자맹 말로센. 뱅자맹은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이웃에 있는 아랍인 음식점 주인 내외에게 맡겨지고 버릇처럼 엄마는 가출을 되풀이 한다. 가출이 끝나고 귀가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산만하게 배를 부풀리고 있어서, 이 책에선 다섯 명과 반half의 씨 다른 동생을 두었는데(엄마는 초장부터 가출 중이고 책이 끝날 때에야 역시 산만한 배를 부여잡고 귀가한다), 동생들을 끔찍하게 사랑해 자신이 기꺼이 다 부양하고, 보호하고, 가능한 한 최대의 복지상태를 누리게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천사다, 천사. 심지어 여동생 클라라를 낳을 때, 산파는 술에 잔뜩 취해 떡이 되어 엄마 옆에서 자빠져 자기만 했고, 의사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 뱅자맹이 직접 받아야 했을 정도다. 당신 같으면 이렇게 하겠어? 할 수 있겠어? 뱅자맹이 천사인 거 맞지?
 책에서는 모두 여섯 명이 사제 폭탄에 의하여 터져 죽는데, 기존의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가 읽는다면 어째 좀 수상하게 죽는다, ‘가능하지 않는 살해법인걸?’ 비슷하게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겠다. 이 책이 나중에 6편까지 나올 소위 ‘말로센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작가도 6편까지 쓸 수 있을 줄 몰랐을 테니까. 한 번 써봤더니 이게 대박을 쳤는데, 얼마만큼 대박이냐 하면 프랑스에서만 백만 권이 팔렸고, 미국 등 영어권을 합해, 다니엘 페낙을 돈방석, 수준을 넓혀, 돈 침대 위에 누워 1893년 남 프랑스 산 상파뉴를 홀짝거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 후속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있었겠어? 그래 시리즈가 시작되는 것이니, 이게 첫 번째 작품이라 아무래도 구성, 살인하는 방법 등등에서 좀 미숙했겠지. 그래 추리소설 전문독자께서는, 추리소설 전문독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결과예측 같은 걸 조금쯤 양해해주시는 편이 좋겠다. 엽기살해와 범죄의 구성 및 해결이 아니더라도, 이 책은 한 페이지에 적어도 한 번 씩 등장하는 유머가 사실 진짜배기니까.
 ‘식인귀’ 하면 딱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프란시스 고야가 그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그림은 검색해 찾아보시라. 너무 괴기해 업로드 포기했다.) 뱅자맹의 막내아우 프티가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에 관한 그림을 그리라니까, 새빨간 옷을 입은 채 산 사람을 뜯어먹는 괴물을 그렸단다. 뱅자맹은 밤잠이 없는 아우들을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모두 모아놓고 자기 머릿속에서 넘쳐흐르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 해주었던 터라 무수한 이야기 속에 고야의 그림처럼 엽기적인 내용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그걸 기억한 무구한 프티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새빨간 입을 가진 식인귀를 그렸을 수 있을 것. 근데 막내가 그린 그림 가지고 책의 제목을 정할 수 있지는 않겠지. 때는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으로부터 거의 강제로 몰수하다시피 넘겨받은 백화점의 내부를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한 명의 독일인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정말로 식인의 의식을 집전하는 종파를 결성했으니 “여섯 식인귀의 오붓한 동아리인 111 사제단.” (366쪽)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여섯 명은 모두 111명의 아이를 죽여 식인 의식을 행함으로써 유사 기독교에서 악마의 숫자로 불리는 666을 구현하게 된다. 이제 세월이 훌쩍 지나 낼 모레 염라대왕을 배알할 입장에 놓인 노인이 된 이들은 누군가에 의하여 한 명, 한 명이 차례로, 그들이 몇 십 년 전 식인의 의식을 행했던 백화점에서 펑, 펑, 폭탄에 의해 산산이 몸이 찢어진 채 죽는데, 누가 그랬게? 왜 하필이면 자본주의 최대의 전시장인 일류 백화점의 희생양인 뱅자맹 말로센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게?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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