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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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콜드 블러드>와 <차가운 벽>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커포티. 짧은 장편으로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지만 마음을 적실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따뜻함과 애틋함과 오래되어 남루한 시절들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 기준으로 수작. 커포티가 스물여섯 살이었던 1951년 작품. 청년시절에 쓴 성장소설이어서 당연히 자신과 비슷한 등장인물을 내세운다. 커포티는 부모의 이혼으로 사촌의 집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곳에 60대 노처녀 숙 포크 양이 있었고, 늙었으되 소녀의 감수성과 순수함과 소심함과 뜻하지 않은 지혜를 지닌 숙 누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 커포티는 이 책을 “깊고 진실한 애정을 추억하며 / 숙 포크 양에게” 헌정한다. 책의 화자 콜린 펜윅은, 엄마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엄마의 장례식 다음날 사촌인 베레나와 돌리 탈보의 집으로 보내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아버지 역시 자동차 사고로 죽는데, 독자로 하여금 아내의 사망으로 인한 우울증이 도져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이 들지만 꼭 그렇다는 증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 ‘나’ 콜린은 아버지의 사촌, 즉 당숙堂叔 아주머니들과 함께 살게 되고, 큰 당숙아주머니 돌리가 나중에 책을 헌정하게 되는 숙 포크 양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다.
 화자 ‘나’ 콜린은 천애 고아. 고아를 돌보는 두 아주머니는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노처녀.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흑인 하녀 캐서린.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이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인 책에서 작은 아주머니 베레나는 혼자 사는 늙은 여인이 자주 그렇듯 알부자로 소문이 났고, 실제로도 대형 잡화상인 드러그스토어와 포목점, 주유소, 식품점, 사무실 건물 등의 실소유주답게 위풍당당하면서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는 한편, 집 안에서는 당연하게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 독재자에 의하여 압제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 감정의 연대를 이루고 있는 상태.
 여기에 중요한 남자 등장인물이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동네 치안판사였으나 지금은 은퇴하고, 아들 둘에게마저 부담감만을 줄 뿐인 찰리 쿨 판사. 또 한 명은 정신이 이상한 어머니로부터 심한 대우를 받아오다가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 다음부터 여동생 둘의 실질적 보호자 역할을 해온 젊은이 라일리.
 위에 이야기한 등장인물들이 한 패거리로 뭉치게 된 이유는, 돌리가 인디언으로부터 전수받은 ‘민간약초를 달인 약’을 통신 판매하는 것을 관찰하던 베레나가 이게 사업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유대인 사기꾼을 데려와 약의 레시피를 돌리로부터 알아내려하자, 돌리가 캐서린, ‘나’ 콜린과 함께 가출을 감행해 이웃의 숲, 나무 위에 지은 은신처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베레나가 보안관에게 이들을 찾아줄 것을 의뢰했고, 쿨 판사를 포함한 한 무리가 은신처에 접근해 이들을 완력으로 끌어 내리려 하면서 이들은 같은 편이 된다. 우연히 이 동아리를 구성하는 성원들은 하나같이 결손 가정 출신이란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선량한 약자가 되고, 베레나와 보안관과 목사로 대표하는 집단은 완고하고, 형식적이며 변하지 않는 율법에 옭매인 규격화된 권력형 인물로 양분화 된다.
 그러나 이 책을 이리 선량한 약자와 규격화된 권력자의 대립으로 읽히지 않는 것. 이게 <풀잎 하프>의 매력이다. 일상적이면서도 잔잔한 웃음을 물게 하는 문장으로 한 의지가지없는 소년이 선량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는 일이 책의 중심이다. ‘풀잎 하프’가 무엇인가. 책의 문장들을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 한에서 약간 변형해 설명하면, 늦은 9월쯤, 하프 같은 목소리를 한숨짓게 하는 계절에 인디언그래스 풀밭에 들판이 석양처럼 붉게 물들고, 불빛 같은 진홍색 그림자가 그 위로 산들거리며 가을바람이 마른 잎사귀를 튕겨 인간의 음악 소리를 내는 것. 풀잎 하프에 대한 것은 책 앞머리에 이렇게 설명하고, 또한 제일 마지막에 한 번 더 말한다. 마른 소리를 튕기는 이파리 사이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빛) 빛깔이 흘렀는데 저렇게 한데 모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바로 풀잎 하프라고. 이야기를 기억하는 목소리들의 하프라고. 추억. 저 남루한 기억 속의 일화와 장면과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서로 기억하는 목소리. 그걸 통해 한 소년은 성장을 하고, 반추하여 책을 썼다. <풀잎 하프>라는 제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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