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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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중반 프랑스에 알랭 로브그리예, 라는 작가가 나타나 사물이나 인간의 모습에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해서 한 시절을 풍미하는 사조思潮 누보로망이 태어난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프랑스 소설문학 특유의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재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나무 그림자 하나를 묘사한다고 가정하자. 여태까지 프랑스 소설가들은 “석양을 받은 도금양 나무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늘어섰다.” 이 정도였는데, 로브그리예가 쓴 <질투>이던가 <엿보는 자>이던가 <밀회의 집>을 보면 “오후 다섯 시 이십칠 분의 태양빛을 받은 도금양의 그림자는 실제 키 3.5 미터보다 2.3배가 더 큰 모습으로 박공이 전체의 25% 차지하는 총 109 제곱미터의 벽면에 17.9도 기울어 있고……” 이런 식으로 바뀐다. 그냥 흉내만 내본 것이다. 감정이 포함되지 않은 드라이한, 하이퍼레알리즘 적 묘사.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나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이런 노력은, <시르트의 바닷가>를 쓴 소설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쥘리앙 그라크에 의하여, ‘과하게 미분화한 시각’이 독자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로브그리예 이후 프랑스 소설문학에서 상당히 많은 작품 속에 어느 정도는 소위 누보로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평소에 주장하던 것이었으며(비슷한 말이 이 책 해설에 적혀 있는 걸 보고 반갑기도 했는데), 미셸 오스트,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평생 단 두 편의 소설만 썼다. 그럴 만하지 뭐)가 쓴 <밤의 노예> 첫 부분부터 다시 비슷한 생각에 잠기게 됐다. 이거, 대단히 부드럽게 묘사한 거다. 쉽게 풀어서 얘기하면, 파리와 센 강 구경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내 입장에선 지독하게 지겹게 읽었다는 뜻. 아, 앞부분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이나 <꿈꿀 권리> 같은 책에서 익숙했던 매우 심오하고 그럴싸하지만 동시에 지루한 미적 관점에다가 누보로망 식의 미분화된 시각을 더한 글을 퇴근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제 침침해진 눈으로 읽어야 했으니 안 그러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독후감을 읽고 <밤의 노예>를 읽으실 분들이여, 그러나 이 고비만 지나가자. 그러면 참 독특한 부모와, 독특한 부모 덕택에 인생을 지질하게 보내야 하는 중년의 남자가 풀어내는 20세기 식 흥미진진한 테세우스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테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는 이 이야기가 크레타 섬에서 있을 법하다고 말함으로써, 1939년생의 지질한 남자이자 주인공인 필립 아르쉐를 테세우스와 비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럼 아리아드네는? 필립의 시 쓰는 유대인 여자 친구 폴라 로첸.
 책을 읽으면서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중간쯤 읽고 나서 무심코 책 뒤표지에 적힌 문구를 봤다는 것.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선’ 시리즈는 원래 1980년대 중후반에 초판을 찍은 것으로, 나름대로 다양한 구색을 갖추었으나(이 시리즈 가운데 단 한 권을 추천한다면 포드 매덕스 포드가 쓴 <훌륭한 군인>을 꼽겠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절대 뒤표지에 소개해놓은 책의 스토리를 읽지 말아야 한다는 함정이 있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땅 끝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 마누라를 데리고 올라오는 오르페우스에게 지상에 닿을 때까지 절대로 사랑하는 에우리디체의 얼굴을 바라보지 말라고 치사한 조건을 다는 것처럼. 물론 오르페우스는 다시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윤회해야 하는 에우리디체를 불쌍하게 여겼기도 하고, 조잘대는 에우리디체의 잔소리를 듣다가 또다시 복잡한 가정생활로 진입해야 하는 게 염증이 나기도 해서, 에잇, 여기서 끝내고 말자, 휙 뒤를 돌아 에우리디체를 영원히 하계로 떨어지게 했겠지만, 하여간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주문처럼 뒤표지를 안 보고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다. 나도 유혹을 이기지 못해 중간쯤 읽다가 뒤표지를 봤으며, 그걸로 김샜다.
 <밤의 노예>는 모두 4부로 되어 있다. 1부의 소제목은 “평범한 소년.” 분위기를 한 문장으로 쓰자면 이렇다.

 “엄마와 내가 차지하고 있는 그 불친절한 행성(行星:집)에 막 상륙한 정찰자(얼마 후 엄마의 정부가 될 남자)는 우리 두 사람의 난폭한 관계에 틀림없이 깜짝 놀랄 것이다.”  (23쪽: 괄호는 필자.)
 엄마는 필립이 어려서부터 아들,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라 외아들인데, 아들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사납게 반대하고, 비아냥거리고, 무시하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 같은 피드백만 쏟아 부어 단기적으로 필립에게 발작을 일으키는 현상을 만들어냈고, 중장기적으로는 사회 부적응자, 무능력자, 의기소침한 인물, 완벽한 실업자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래 지금 마흔 살이 됐는데도 예순이 넘은 엄마와 한 아파트에서 동전 한 푼 없이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존하며 산다. 엄마는 완전한 폭군이기도 하고, 아들에겐 적극적인 압제자이자 모든 기회의 박탈자로 존재하며, 유일하게 현재 연애하고 있는 유대인 시인 아가씨하고의 연애에만 만족한다.
 그럼 아버지는? 어려운 문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레지스탕스를 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사업체를 발전시켜 독일군대에 물자를 대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 독일군이 가까운 시일 내에 벌일 극비 작전을 빼내 레지스탕스와 영국군에게 전송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엔 이런 역할을 하는 저항군도 많았고, 그 가운데엔 고급 창녀들도 포함한단다. 독일군 장교들이 단골로 다니는 유곽 건물의 꼭대기 층에 최신식 모르스 무선송수화기를 장착 하고나서 임시 독일 대사관에서 벌어진 무도회나 유곽의 비밀스런 방에서 얻은 고급 작전을 미리 포착해 런던 폭격, 파리 시내 유대인 일제 검색 같은 걸 미리 알려줌으로 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 친 독일 경제행위의 죄목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일순간에 사라져야 했으며, 독일 장교와의 빈번한 잠자리를 이유로 머리카락을 박박 깎인 채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단다. 스파이 역할은 대놓고 할 수 없는 성격이었을 테니. 게다가 드골 정부가 친독인사들에게 얼마나 엄정했던가. 전쟁 중 엄격한 통행금지 하에도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아버지는 구하기 힘든 음식들을 한 보따리 안고 들어와 잠깐의 안부를 전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냥 구둣발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기억이 남아있다. 조용한 밤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만 정적으로 깨던 시절. 그리 키가 크지 않았으나 어떤 거인보다도 찬란한 진정한 거인의 풍모를 필립은 가슴에 담고 살았다.


 “과거. 우리가 끊임없이 눈치를 채지만 어쩔 수가 없는 그 모든 자기 분열. 나는 조금도 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미래보다는 과거나 자기 분열 쪽으로 향해 있다. 많은 동시대인들과 어떤 부패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부패라는 것이 더 유쾌하거나 기분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온몸이 습진에 걸린 한 마리 개다. 나는 나의 오래된 흉터, 추억들을 맹렬히 긁어댄다. 나의 추억은 불바다, 피바다로 변했다.” (64~65쪽)


 아무 사회생활도 하지 않는 필립 아르쉐에게 남은 것은 레지스탕스를 위한 스파이였던 자랑스런 아버지와,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와 생각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만 일삼는 어머니, 전쟁 후 아버지가 사라지자 아버지 대신 회사를 경영하고 집안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똑똑한 경영인 토니 소앙에 의하여 만들어진 과거라는 틀 속에 갇혀 있다. 전형적으로 불행한 사람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 1부에선 주인공 필립이 생각하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담이다. 2부는 엄마 지네트가 필립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과거를 통해 아들과 엄마가 함께 겪은 외조부모가 어떻게 다른 추억을 만들었는지, 기억과 시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지 전율하게 만든다. 3부는 애인 폴라 로펜과 함께 했던 며칠을 중심으로 폴라의 아버지를 통해 오래 전에 사라진 자신의 친부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게 되고, 드디어 아리아드네 역할을 하는 폴라를 버리고 아버지를 찾아 미노스의 미궁으로 잠입하는 4부에 관해서는, 안 알려줌. 다만, 책이 4부에 접어들었는데, 지금 책을 펼친 장소가 버스나 지하철이라면 이젠 덮을 시간이 됐다는 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읽지 못할 정도로 야한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만 찔끔, 알려드린다.
 초입에 얘기했듯이 현미경적 묘사가 가끔 신경줄을 건드리기는 하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 책을 써서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공쿠르 상 수상작품에 대해 조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충분히 즐길 만하고, 공감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며, 흥미를 자아낼 만큼 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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