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수수께끼
V. S. 나이폴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장소설 <미겔 스트리트>를 읽고 호기심을 느꼈던 작가. 서인도제도의 한 섬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인도인 이민 3세로 태어난 나이폴이 어려서부터 싹수가 있어 시험을 치룰 때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선장先場하니, 훈장이 이를 보고 채점을 하면, 자자字字이 비점批點이요, 구구句句이 관주貫珠이어서, 당시 식민모국이었던 영국의 문교부장관이 이를 ‘어엿븨 녀겨’ 전액 장학생의 자격으로 옥스퍼드 유학을 시켜주기에 이르렀던 것. 인도 천민 계급으로 서인도제도까지 소작인으로 이주해 와, 이전까지는 흑인 노예들이 하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에 종사했던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이거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한 마리 승천한 꼴인데, 어린 시절을 이방인으로 그것도 식민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의 가난한 동네 미겔 스트리트의 추억을 연작으로 담은 작품은 솔직히 그리 인상 깊게 읽지를 못했다. 아무리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 하더라도 나 싫으면 안 읽는 거지, 이름값 가지고 책 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래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그의 다른 작품,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을 일단 서점 보관함에 집어넣고 살까, 말까를 무한히 왔다 갔다 하고 있다가, 한 권짜리 <도착의 수수께끼>를 발견, 이를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한 권짜리니까 <비스와스....>보다 부담감이 덜했던 것이 주 이유였다. 근데 왜 나이폴이 별로였다면서 굳이 찾아 읽을 생각을 했느냐고? 모르겠다. 책 구경을 할 때마다 나이폴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그게 안 되더라는 거. 그래 이 책도 조금은 주저하면서 구입했고, 이거 지루하면 어떡하지, 조금은 걱정하면서 첫 페이지를 넘겼다.
 V.S. 나이폴. V.S는 이름이 하도 복잡해서 그냥 영어로 쓴 것. 우리말로 하자면 “비디야다르 수라지프라셔드 나이폴.” 그냥 “V.S. 나이폴”이라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익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위에서 영국의 문교부 장관이 나이폴한테 전액 장학금으로 옥스퍼드 유학을 허락했다는 거 까지 이야기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이폴은 인도에서 건너온 모든 친척들이 모여 트리니다드 공항 건물에서 거창하게 송별회를 한 다음 ‘팬 아메리카 월드 항공’ 소속 경비행기에 탑승해 푸에르토리코를 거쳐 뉴욕까지 가서 일박을 하고, 거기서 배로 갈아타 영국에 도착해 런던 얼스코트라는 동네의 하숙집에서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옥스퍼드로 옮기고, 졸업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 스톤헨지가 멀지 않은 시골 월든 쇼의 한 장원에 속한 집에 정착하게 된다.
 <미겔 스트리트>에서는 화자의 소년시절, 그러니까 트리니다드를 떠나기 전까지 그곳에서 실재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희극적 비극의 감각으로 써내려갔고, <도착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Arrival>은 월든 쇼의 장원의 한 시골집을 세든 상태, 약 1975년 쯤을 전후한 시간적 배경과, 이 책을 정말 쓴 1984~86년의 시점이 수시로 교차하면서, 어느 정도 시골집에 정착을 한 단계에서 동네 인물들, 1부에서는 ‘잭’이란 야성적이고 성실한 중늙은이와, 이이가 죽은 후엔 그를 대신하는 젊은 남녀들을, 2부에선 자신이 여행을 하며 만나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 3부와 4부는 장원에 속한 장원의 소유자와 관리인 부부, 기타 주변인등을, 5부는 다시 트리니다드로 돌아와 그곳의 친척들에 관해 서술한다. 무엇보다 웨일즈 지역에 인접한 영국 농촌을 완상하는 나이폴의 시각과 문장이 참 좋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일찍이 슈티프터의 <늦여름>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기도 한 적이 있다는 게 떠오른다. <도착의 수수께끼>는 일찍이 슈티프터가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의 예술품에 대한 미학에는 감히 미치지 못할지언정, 남부 영국의 시골, 나름대로 소박한 자연의 찬가를 담은 모양이 비슷한 지역을 쓸쓸하게 노래한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생각나게 만든다. 제발트는 영국 남동쪽, 나이폴은 남서쪽을 노래하고 있기는 하다.
 1부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이폴의 소설이 이런 거였나? <미겔 스트리트>를 발표한 것이 1959년. 그의 나이 스물일곱. 식민지 출신 이방인으로 영국에 도착해 생전 처음 코스모폴리탄의 위용을 경험한지 9년만의 일이었다. 혹시 그래서(작가가 너무 젊어 쓴 작품이라서)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덜 재미있게 읽은 건가 싶기도 했다. <도착의 수수께끼>에서 ‘도착’은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異常)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을 뜻하는 것인 줄 알았다. 왜 안 그런가. 소설 문학에서 ‘도착’이라면 倒錯을 먼저 생각한다고 뭐 이상한 것도 아니잖은가. 하, 그런데 도착arrival이라니. 생각도 못했다. 도착이 있으려면 반드시 ‘출발’ 또는 ‘이별’ 같은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 먼 인생으로 비유를 해보자면 사람이 낳는 것을 출발이랄 수 있고, 죽는 것을 도착이랄 수 있겠다. 트리니다드를 출발해 런던에 도착했고, 런던을 출발해 시골동네 월든 쇼의 장원에 도착을 한다. 그럴 때마다 인생 또는 삶은 작가에게 수수께끼를 냈다보다. 아침엔 네 발로, 하루 종일 두 발로, 황혼이 오면 세 발로 걷는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너나 나나 다 출발하고 도착하고, 출발과 도착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일을 세상살이라고 하면서 도착점에 가까이 올수록 괜히 그 누추했던 세상살이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는 까닭에 그걸 ‘추억’이라 포장하면서 산다. 당신이나 나나 다 마찬가지다.
 나이폴의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운 서정 전원시인줄 몰랐다. 문장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굴곡 없고 사건도 별로 없고, 줄곧 나붓한 단어들만 나열하는 고독의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늦겨울 밤이 기우는지도 모른다. 본문만 552쪽. 내 경우, 적어도 400쪽 까지는 문장을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글자들이 모여 쿡쿡 가슴을 찌르는 공감에 기뻐하면서, 읽은 문장 다시 읽어보기까지 했다. 실제로 나이폴(혹은 역자 최인자)은 독자가 문장을 한 번에 쉽게 읽고 지나가지 못하게 썼다. 무수한 괄호 안의 설명, 일부 서양 작가들의 특징인 문장 기호 “―”의 연속. 그리하여 한 문장을 두 번, 세 번, 네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숱하다. 일부 독자는 이런 문장을 매우 싫어할 수 있고, 나도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입장이지만, 워낙 아름다운 글들이 쏟아지는지라,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쓴 시기가, 아, 1986년,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높이 든 마거릿 대처 남작부인이 전 영국 국토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때려잡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그때도 영국의 한 시골에서는 이런 미문들이 생산되었던 것이구나.
 그러나, 400쪽이 넘어가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지치더라. 분명히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감성의 포착, 삶과 전원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시선, 이것들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생각해보시라. 그래, 과하면 부족하느니 못하다는 말, 그건 진리다. 그래도 결심했다. 올해 말에 그의 다른 작품, <도착의 수수께끼>보다 더 긴 장편소설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을 읽기로. 나이폴의 서정적 전원 문장이 너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