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8
앙리 바르뷔스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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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대단히 유명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바르뷔스의 번역 저작이 이 <지옥> 말고는 한 권도 없다. 이이가 말년에 공산주의에 심취해, 1934년 모스크바 방문 중 현지에서 사망해 그랬나? 1873년 생. 이 작품은 1908년 출간. 역자 오현우 선생은 작품 해설에서 “바르뷔스는 에밀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풍의 작품세계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이 책 <지옥>에서 졸라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졸라라기보다 오히려 세기말 주의 비슷한 탐미, 허무, 비장, 죽음 같은 어두운 무드가 초지일관 계속되는 데 조금 질렸을 뿐이다.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 작가 자신이 시집 <흐느끼는 여인들>로 스물두 살에 데뷔를 해서 그런지 시적인 산문으로 위에서 얘기한 세기말 적 분위기를 정말 아름답게 써놓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단박에 바르뷔스의 글에 빠져버렸고, 문학 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각적이고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만일 그것들을 독후감에 인용한다면 A4 용지로 열 장은 넘겨 써야할 거 같다.
 그러나,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만고의 진리. “꽃노래도 삼세번.”
 100쪽을 넘기면서 엉뚱하게도 스페인의 시인이자 소설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생각났다. 저절로 그이가 떠오르더라. 탐미적이고, 아름다움을 찾는 뛰어난 시선과 단어를 가진 매력적인 문장가. 그이가 쓴 <인상과 풍경>을 읽고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세상에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 그런데. 처음에 깜짝 놀랐던 로르카 표 몽상과 탐미와 섬세한 감각이 하도 계속되니까, 나중엔 아주 질려버리고 말았다.
 바르뷔스의 이 책은, 고독한 한 프랑스 남자가 당연히 여성을 찾다가, 몇 번의 좌절 끝에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 벽의 빈틈으로 옆방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담았다. 우연히 찾게 된 빈틈으로 처음엔 그냥 빈 방, 그 텅 비어 있음의 나체 상태를 보는 것에서, 하녀가 혼자 들어와 반라의 상태까지 되는 것을 지나, 드디어 방에 든 첫 번째 커플. 사촌 관계인 둘이 서서히 피부를 맞대고, 키스를 하고, 옷을 벗고 벗기는 순간 그들을 찾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여성 동성애자 커플을 지나, 드디어 성인 남성과 여성이 저녁 어스름 빛 속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는 시인, 여자는 ‘에메’라는 이름의 유부녀. 이른바 불륜 관계. 당연히 이 소설은 작가의 뇌 활동에 의해서만 쓰인 것이어서, 이들이 쉬지 않고 입을 맞추며 나누는 대화 역시 전부 작가의 상상력일 터인데, 매우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치명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다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 지쳐빠지게 만든다. 남편을 통해서는 성적 만족도, 사랑의 확인도 감지하지 못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한 방에 들어 이리도 장황한 말을 할 수, 들을 수 있을까. 여자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러면 남자는? 리비도의 분출을 억제하고 자연의 어둠이 그대와 나 사이를 막아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적극적 몸의 접촉을 억제하고, 죽자 사자 아름답고 치명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만 나불대며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농담해? 이런 의미에서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 풍”은 헛소리, 또는 이 작품을 뺀 다른 소설에 해당하는 말이라 단정했다. 이들의 대화에서 주가 되는 명사들은, 거의 다 추상명사들이다. 꿈, 슬픔, 죽음, 과거, 사랑, 구원, 선량, 겨울, 비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tc, etc. 그래, 그래. 나중에 하긴 한다. 작품을 처음 출간한 1908년 수준으로 보면 매우 선정적일 수도 있는 언어로.
 이어서 난데없이 죽음을 앞둔 그리스 출신 부자 노인이자 병자와, 젊은 아가씨와 출산을 앞둔 여자.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필이면 임산부는 화자이자 며칠 후 실업자가 되면서 호텔방을 해약하고 나가버릴 음험한 관찰자 앞에서 산도를 훤하게 드러내놓고 출산을 하며, 병자는 데려온 젊은 처녀와 결혼을 통해 거액을 상속해주고, 그리하여 부인이 된 여자는 눈만 살아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벽의 빈틈 사이로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에게) 이제 온전히 남편의 것이 된 자신의 동정녀 상태인 나신을 공개하고,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병자는 가톨릭 신부 앞에서 다분히 사회주의적 토론을 통해 회개하기를 거부한 후 죽음을 맞으며, 죽음을 앞둔 환자 앞에서 호텔 주인이 몰래 들어와 가방 속에서 지폐뭉치 한 다발을 훔쳐나간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추상명사의 대행진. 이어 상복을 입은 처녀 과부 안나가 자신의 처녀성을 던져버린다. 독자는 자신이 읽고 있는 장면을 소설의 진짜 스토리의 하나로 읽어도 되고, 작가 또는 화자의 상상력의 힘으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자신을 벽의 틈새로 옆방을 엿볼 수 있는 한 호텔방에 유폐한 채 스스로를 관음의 지옥 속으로 떨어뜨린 남자의 이야기. 나중에,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옆방을 들여다보는 남자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는, 그 즈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소설가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글쎄. 내 생각엔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지난 세기말적 작품이 조금 더 발전한 상태인 것 같다. 20세기 초반 작품임에도 상당히 모던한 감각이 돋보이는데, 내 취향엔 조금 과했다. 내가 18세기, 19세기 초반 독일의 낭만주의 작품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남이 써놓은 글 열심히 필사하는 작가 지망생들은 읽어볼 만하겠다. (근데 ‘필사’가 좋은 방법이긴 한가? 필사 좋아하다가 자신이 필사해놓은 대목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베낀 경우는 없을까? 난 있다는데 만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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