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94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혜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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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런 책을 읽어.
 여태 이리 생각했다. 그래도 이 책을 읽게 된 건, 알파벳 문화권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숱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나날이 궁금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이 책의 역자이자 건국대 영어영문학과에 소속되어 있는 이혜수의 작품 해설을 보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거의 최초의 서양 소설이며, 심지어 최초의 한글 번역이 1908년 잡지 『소년』에 실렸는바, 번역자가 조선 후기 천재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고, 11년 후 3·1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이란다. 물론 일어 번역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당시엔 거의 다 그랬으니까.
 『소년』. 딱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다. 최남선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그건 그렇고, 다른 곳도 아닌 이 잡지에 <걸리버 여행기>가 실렸다는 건, 이후 우리나라에서 110년 동안 <걸리버 여행기>를 우화나 동화쯤으로 여기게 만드는 씨앗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걸리버 여행기>는 어려서부터 숱하게 읽어봤는데, 하나같이 소인국, 대인국까지였으며 그저 조금은 우스운 동화, 어른이 되면 읽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해왔다.
 이거, 틀린 생각이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1667년생. 잉글랜드 부모를 두었으나 더블린에서 출생한 인물. (어디서 본 조합이라고?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에서 이런 부부가 많이 등장한다. 이 부부가 낳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도.) 아무리 무뚝뚝한 잉글랜드 사람이더라도 물 좋은 아일랜드 와서 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나보다. 스위프트의 전성시대가, 아이고, 앤 여왕 시대다.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가뿐하게 승리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야망을 차단한 후 스코틀랜드까지 통합해버린, 해가지지 않는 왕국의 여왕님. 소위 대영제국의 전성기다. 세상 곳곳에 영국 상선들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무역과 약탈과 전쟁의 승리로 북유럽의 섬나라에 쏟아져 들어오는 금덩이가 넘쳐나던 시기. 그러나 절정기라는 밝음 속에는 상대적으로 깊은 어둠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 상류사회는 친절과 예의와 기사도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와 부의 축적을 위해 온갖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 명을 부귀를 위해 천 명의 영국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끝도 없는 노동을 하다 지쳐 사기꾼, 노상강도, 소매치기, 주거침입자, 포주, 익살꾼, 도박꾼, 매춘부, 술고래, 매독보균자 등으로 추락해갔다.
 때는 절대주의 시대. 밖으로, 밖으로 탐험가들을 내보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시절. 이에 발맞추어 일군의 해적, 조직폭력배 등도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미개척지에 상륙해 눈에 띄는 원주민 아무나 도륙을 내고 조그만 나뭇조각이나 판판한 돌 위에 이 땅의 주인은 영광스런 대영제국의 앤 여왕의 식민지로다, 써서 세운 다음, 원주민 수십 명을 배에 태워 잉글랜드로 귀환해 여왕을 배알, 잡아온 원주민을 식민개척의 증거로 제출하기만 하면 해적이나 조직폭력배에서 졸지에 말단의 기사로 임명이 되던 야만의 시절. 벌거벗은 원주민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해군이나 해적들 가운데 누가 더 야만의 상태인가. 글쎄, 스위트프가 이런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주인공이자 선상의사船上醫師인 걸리버가 희한한 네 번의 항해를 하면서 모험지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 유럽과 영국이 누리던 영광의 이면을 날카롭게 꼬집어 비틀어버린 쓴 것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다. 그러니 이 책은 소인국과 대인국을 드나드는 환상동화로 각색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이 신랄한 풍자와 해학을 모르고 지나갔을 수밖에.
 작품에 대해 한 마디는 꼭 해야겠다. 이 책은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초엽에 쓰여 출판했다. 작중에서 걸리버의 입으로 숱하게 얘기하고 있듯이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수사 같은 걸 최소로 사용하고 오직 걸리버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일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이 주는 즐거움도 애초 배제한 글인 것도 맞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귀족 세계 전반에 대한 앞 뒤 가리지 않는 스위프트 식 풍자와 해학도 18세기, 19세기까지는 실로 적나라해서 독자에게 통쾌한 동의를 선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지났음에야. 서양 문학을 읽기 위한 기초체력을 함양한다는 의미에서는 읽어봐야 하겠지만 벌써 200년이 흐른 시점에서 작가와 주인공의 의식에 동감하고 말고는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 호머의 <오디세우스>와 소포클레스의 <독재자 외디푸스>는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한 감동을 준다. 왜? 두 작품의 차이점? <걸리버 여행기>는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이고, 그리스 시대의 두 작품은 기본적으로 스위프트의 것보다 훨씬 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보다는 개인이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이라서.


 영국에 여왕 바로 다음 지위로 ‘총리대신’이 있었나보다. <걸리버 여행기>가 얼마나 신랄한지 예를 드는 의미에서 좀 길지만 인용한다.


 “총리대신으로 오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아내나 딸 혹은 누이를 신중하게 처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임자를 배신하거나 음해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공개석상에서 분노에 찬 열의로 왕실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현명한 왕이라면 이 중 마지막을 실행하는 사람을 쓸 것이다. 그런 열성분자들이 결국 주인의 뜻과 감정에 가장 비굴하게 충성한다는 것이 늘 입증되어 왔기 때문이다. 총리대신은 모든 임명권을 지니며, 상원이나 대의회의 다수 위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면책 법령이라 불리는 편법에 의해 퇴임 후 사후 문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국가의 전리품들을 가득 안은 채 공직에서 물러난다.
 총리대신의 공관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학교다. 시동과 종복, 문지기도 그들의 주인을 따라하는 것으로써 각자 구역의 총리대신이 되며, 오만과 거짓 그리고 뇌물이라는 세 가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게 그들은 최고 지위의 사람들 덕분에 제2의 왕실을 이룬다. 또 가끔 교활함과 뻔뻔함 덕분에 여러 단계를 거쳐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후계자가 되기도 한다.
 총리대신은 보통 타락한 매춘부나 총애하는 하인에게 지배받는다. 이들은 모든 특혜가 전달되는 경로이기에 궁극적으로 왕국의 지배자라고 제대로 불리기도 한다.” (371~372쪽)

 

 

 

 

 

 별점을 깍은 이유.

 나는 잘한 번역인지 오역인지는 모른다. 번역한 한국어 문장만 본다. 역자의 우리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동형과 피동형이 너무 많다. 영어 문장을 직역해서 그럴 거다. 결과는, 우리말이 되게 어색했다.

 오탈자의 교정, 교열? '을유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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