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야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6
한사오궁 지음, 심규호 외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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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가장 잘 팔리는 시리즈, ‘세계문학전집’의 346번째 작품.
 20년 전,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을 시작하면서 편집위원 김우창, 유종호, 정명환, 안삼환은 이렇게 선언했다.


 “새로 작성할 것은 비단 역사만이 아니다. 번역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두시언해」는 조선조 번역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이 필요하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옙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모두 세 문단으로 되어 있는 선언문 가운데 두 번째 문단이다. 세계문학 가운데 고전이라고 칭할 만한 것들을 다시 번역하겠다는 갸륵한 선언이고, 독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당대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이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많은 작품들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선언문의 뜻과 같이 새로운 호소력으로 다시 번역한 작품을 재독하기도 했다.
 오늘 독후감을 쓰는 <일야서>로 돌아와서, 읽는 중에 2012년에 관한 서술이 등장하는 걸 발견하고 얼른 책 뒷날개의 ‘선언문’을 확인했다. 어김없이 이 책에도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면서” 라는 제목의 선언서가 인쇄되어 있다. <일야서>는 2013년에 중국에서 발표 후 상하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고, 우리나라엔 2016년 민음사가 최초로 번역, 과감하게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목록에 올려놓았다. 위에 인용한 선언문의 두 번째 문단을 참고하면, 2013년에 최초 발간한 <일야서>, 아직까지는 지구의 다른 지역 독자들과, 무엇보다 시간의 판단을 받지 못한 작품을, 민음사 편집위원들은 두보, 괴테,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역시 1994년에 발표한 작품을 98년이던가 96년에 세계문학 시리즈 134번으로 올린 전력도 있었다. 파묵을 읽은 시점이 2010년대여서 그런가보다 했으나, 시리즈에 어울리는지는 더 숙고해봐야 한다.
 출판을 통해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웃기고 있네), 백성의 소리를 올곧게 듣겠노라는 민음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가 그동안 별로 돈이 안 됐는지 슬슬 시리즈를 닫으려 했다가 난데없이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받아 잠깐 돈을 벌었지만, 그래도 모던 클래식을 계속할 생각은 없는 거 같다. 그렇지 않다면 2013년에 발표한 신작을 2016년에 세계문학전집에 끼워 넣을 궁리까지는 안 했을 거 같다. 물론 편집위원들이 판단하기를 두보와 괴테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과 견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읽어보니 한사오궁의 <일야서>가 비록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이긴 했지만, 상당히 중요한 판단근거, 시간의 검증을 아직 받지 못한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혹시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내놓지 않으면, 즉 단행본으로 만들면 팔리지 않을 거 같아, 바짝 쫄아서 궁여지책으로 346번째 자리를 준 거 아냐? 이리 야박하게 이야기 하는 건, 원래도 알았지만 요즘에 와서 출판사와, 저·역자들과 기타 관계자들이 자기들은 책 같지도 않은 걸 설사하듯 찍어내면서 얼마나 독자를 우습게 아는지 실감을 해서 그렇다. 우습게도 민음사한테는 이 비슷한 유감은 없다. 그래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하는 격이지만, (하는 걸 보니) 뭐 여기라고 별다르겠어? 창업한 분이 별세하니 기업의 정신까지 함께 묻힌 것 같다. 안쓰럽다. 출판사 입장에선 이런 평가가 억울하겠지. 그럼 허튼 소리 안 나오게 하시면 된다. 외밭에서 신발 고쳐 신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쓰니, 한사오궁과 그의 작품 <일야서>에게 좀 미안하다. 서두가 너무 길고 거칠어 여차하면 내가 작품 자체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앞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이 책, 재미있다. 그렇다고 명작이나 걸작이라 상찬할 만큼은 아니니 오버하지는 않겠다.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은 아니더라도, 현대사에선 상당히 어려웠던 시절, 문화혁명 시기에 도시를 떠나 시골 깡촌으로 내려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을 지내야 했던 지식인 청년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제는 중국소설도 많이 소개되어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에도 익숙해 사실 이색적이거나 특징적인 것은 별로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 눈으로 보기엔 더럽고,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중국의 농촌 풍경은 불과 30년 전의 우리나라 농촌 모습보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소년 시절까지 학생 신분으로 도시에서 삽 한 번 잡아본 적 없이 지내던 고운 손의 지식청년들 가운데 많은 수는 강제로, 적은 수는 분위기에 휩쓸려 자진해 가장 외진 시골로 내려가 갖은 고생을 하는 이야기. 여기까지는 그렇다. 충분히 읽어봤다. 중류계급 이상에서 살던 학생출신이 야생동물이 출몰하고, 60년대에 3년간 지속한 흉작으로 배를 곯아 사람의 해골을 씹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식권 서른 장을 걸고, 모기와 빈대, 벼룩, 이가 득시글거리며, 뭔가 메스꺼워 한 번 왈칵 토했더니 선충, 쉬운 말로 해서 회충 여러 마리가 뒤엉킨 것이 쑥 튀어나오고, 쥐와 고양이를 잡아먹어야 했던 참경 말이다.
 내가 읽은 이 책의 매력은 이런 개고생하는 장면이 아니다. 그곳에 갔던 지식청년, 이들을 ‘지청’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지청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와 누구는 복학을 하고, 누구는 새로 입학을 하고, 누구는 공기업에 취직을 하고, 누구는 사업을 하고, 누구는 깡패가 되고, 누구는 정치범이 되고, 정치범과 결혼했던 여자는 아이를 고모 부부에게 맡기고 에베레스트를 넘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나고, 등등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당시에 하방당해 시골로 내려가 수년 동안 젊은 시절을 보낸 잃어버린 세대라고 역자 심규호는 해설에서 이야기하는데, 바로 이 로스트 제너레이션들의 다양한 실패의 삶이 나를 매혹시켰다. 한사오궁은 여기에다가 하방 또는 하향해 내려간 농촌 ‘바이마후 호’에서 작업반장 또는 생산대장 등의 뒷이야기까지 포함시키기도 하는 바에야. 사람의 해골까지 씹어 먹는 가난한 깡촌 바이마후, 어째 한국말 발음으로, 가장 비싼 벤츠, ‘마이바흐’와 비슷한 것도 재미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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