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7
정궈웨이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독교, 특히 가톨릭에선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 거의 절대적인 의미를 둔 것 같다. 성체배령이 여기서 기인한 듯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제자의 세 번에 걸친 배신, 유다의 밀고 등등도 있지만. 물론 집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검은 양의 의견이니만큼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성경에 쓰여 있는 바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새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경 ‘말씀’은 네이버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톨릭, 개신교 중 어느 쪽 성경인지 모르겠다.) 기독교인이 아닌 내가 어찌어찌하여 예배당에 가 미사집전을 하는 흰 옷을 입은 사제를 본(구경한) 바, 영세를 받아 자격증을 취득한 자들에 한해 하얀 밀떡 한 개씩을 혀 위에 올려주고, 자신은 붉은 포도주를 잔에 담아 마시면서 위와 같은 ‘말씀’을 읊었다. 내 기억으론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했던 거 같은데, 물론 그게 중요하진 않겠지. 하여간 포도주는 사제 혼자 홀랑 마시고 그것도 아까운지 다시 물을 부어 헹구더니 헹군 물까지 그냥 꿀떡 삼키는 걸 보고, 아 드러, 길 잃은 어린 양은 이런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불경스럽게도.
 정궈웨이의 드라마 <최후의 만찬>은 이런 거창한 의식의 집전은 아니다. 아니, 거창하지 않지만 거의 비슷한 무게로 심각한 의식이 집전이다. 죽음을 앞에 둔 마지막 식사. 그게 누구의 죽음이냐가 무에 차별이 있겠으랴. 그러나 극작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성경에 나오는 신성한 것이라기보다 유진 오닐을 읽는 거 같은 쓸쓸함의 바람이 휙휙 불어온다.
 등장인물은 딱 세 명.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아버지는 마지막에 한 1분가량 등장하니 극의 거의 전부는 어머니와 아들이 저녁을 함께 먹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어머니가 40세, 아들이 22세. 그러니까 18세에 어머니가 임신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젊은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결혼 후 순식간에 도박에 빠져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개망나니로 돌변했다. 집안에 돈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죄다 긁어가 경마, 파친코 등의 도박장에 가져다 바치고, 어느 순간 수중에 거액이 떨어지면 홧김에 길가의 여자를 사 만족을 얻고, 여기서 얻은 흉한 성병을 아내에게 옮기는 것도 모자라, 쉴 새 없이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폭행을 행사한다. 초등학교 2학년, 일곱 살 때 아들 궈슝은, 자신이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돈을 따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숨넘어가기 바로 전까지 두드려 맞았으며, 이 일로 기어이 아버지는 감옥에 가고 궈슝은 법원의 판단으로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여덟 살 때까지 고아원에서 살아야 했다. 고아원에서 나온 후에 홍콩사회에 적응해 나름대로 살아보려 했으나 이미 비뚤어진 성격 때문에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연애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하필 오늘 아침 애인이 짐을 싸 떠난 상황이다. 바로 이때, 엄마 리빙한테,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전화가 온다.
 “그 사람. 그 개자식은요?”
 궈슝이 말한 사람, 그 개자식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엄마 리빙은 그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집에 와서 밥이나 한 끼 하자고, 그래서 무척이나 오랜만에 모자간 둘이서 돼지사골로 끓인 곰탕을, 자신들의 최후의 만찬으로 하고자 하는, 참 쓸쓸한 홍콩의 엘레지.
 홍콩의 하층민이 그려내는 삶의 이야기가 조금은 궁상맞지만 괜찮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