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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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 내 또래 사람들에겐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일종의 아우라, 또는 동경어린 존경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150cm 정도 작은 체구의 절름발이 유대인.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한 군대와 사회민주당이 야합한 무리에 의하여 소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강타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머리통에 확인 사살을 받고는, 시신마저 국경의 운하에 던져져버린 비운의 혁명가.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역사학자, 문필가, 정치가였던 막스 갈로가 서기 2000년, 20세기를 마감하며 새 세기를 여는 시점에 지난 세기의 대부분을 관통했던 공산주의를 조망하면서 새삼스레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을 썼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년 3월 로자 룩셈부르크의 탄생에서 1919년 1월에 암살당하기까지 갈로는 그녀의 일생을 일곱 부분으로 잘라 전 과정을 묘사한다. 부르주아는 아니지만 폴란드 국경도시 자모시치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로자.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골수 결핵에 걸려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장애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독서와 글쓰기에 입문한다. 독서와 사색과 글쓰기. 거기다가 유난히 총명한 두뇌. 로자가 속한 유대인 가정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교육열이라고 한다. 그래 부모는 로자를 스위스 취리히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고, 로자는 그곳에서 사회주의에 눈을 뜨며, 공부도 열심히 해 얼마 되지 않아 법학박사 학위를 딴다. 이어 첫 남자이자 평생의 혁명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의 인도로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하면서 경제학 박사 학위마저 받아낸다.

 

 

레오 요기헤스


 이어 스물일곱 살 때 구스타프 레뷔크라는 남자와 혼인을 해 독일인이 되는데, 레뷔크하고 혼인신고를 마친 다음 시청현관 앞에서 곧바로 헤어지고 5년이 흘러 다시 이혼을 할 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다. 독일인이 되기 위한 위장결혼이었던 것. 그러나 지금도 구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검색하면 남편으로 이이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글로 쓰인 서류가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기관지를 통해 수정주의자이자 사민당의 거물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통박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룩셈부르크. 이후 이이는 특별한 통찰력과 강력한 단어를 동원한 글쓰기로 독일 혁명의 기틀을 잡고 행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거침없이 혁명을 주장하는 글쓰기와 천부적인 웅변 능력으로 국제 인터내셔널에서도 스타덤에 오른 이이는 레닌, 스탈린과도 안면을 트며 (스탈린을 별개로 하고) 레닌과 기묘한 동지의식을 쌓기도 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개진, 동의, 협력하는 한편 자주 서로를 공박하기도 서슴지 않는다. 레닌이 혁명에 성공하자 당시 독일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룩셈부르크는 감옥 안에서 한정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정보만 가지고도 소비에트에서 향후 벌어질 독재와 집단숙청, 공포정치 등을 예견하며, 비록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노선을 달리한다. 레닌이 권력을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한 반면,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체제 역시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상적 혁명관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 독자가 읽기에 룩셈부르크의 특징이자 한계가 바로 이런 낭만적 혁명가 기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아는 게 짧아 그냥 ‘낭만적 혁명가 기질’이라고밖에 하지 못했지만, 막스 갈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룩셈부르크는) 정치 문제에서는 ‘현재’에 자리잡지 못하고 항상 다른 곳에, 더 멀리, 일반적인 역사적 전망 속으로 자신을 던지곤 했다. 그건 이론이나 지식 측면에서는 높이 살 만한 미덕이지만, 전술을 결정해야 할 때는, 다시 말해 손에 총을 거머쥐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쓸모가 없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된다.”  (579쪽)


 위 인용은 독일 공산당,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중심으로 하는 스파르타쿠스 단 입장에서 약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혁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1919년 1월 5일에 있었던 노동자, 귀향군인들로 이루어진 8만 명의 시위에서, 기어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하고 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가 늘 그렇다. 아이디얼리스트는 보기는 좋아도 실속이 없는 거. 로자 룩셈부르크도,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그들의 뇌 속에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상의 틀에 사로잡혀 있었다. 손 안에 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로자는 폭동 후의 결과, 1871년 파리 코뮌의 후속 모델로 베를린 코뮌, 즉 한시적 성공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못했고,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일초가 급한 군중을 앞에 놓고 수뇌부 회의를 무한정 늘려 혁명의 동력이 될 노동자, 귀향군인들의 맥을 뺀 것과 동시에, 사회민주당과 군부세력에게 반전을 꾀할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공산당과 레닌의 차이점이었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룩셈부르크가 일찍이 예견했던 것과 한 치 다름없이, 레닌에 의해 소비에트에서 벌어지고 있던 공포정치와 대량학살의 공포가 독일 혁명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 가장 큰 위협이었다. (혁명이 끝나면 너나 나나 다 죽는 거야!)
 여태까지 쓴 것이 다는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러면서도 천생 여자였고,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자신의 묘비에 “츠비-츠비”란 두 음절을 새겨주길 바란 룩셈부르크. “그건 검은 박새들의 울음소리예요. 내가 그 소리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면 새들은 금방 날아오곤 하지요.” (199쪽) 혁명가 말고도 우애 좋은 유대인 가정의 막내딸로, 첫 남자 레오 요기헤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파란 젊은이들과 사랑을 나누었던 자유연애가의 모습도 그리고 있다. 혁명가이기 전에 인간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것을 그리려 애쓴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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