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의 노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6
판쥔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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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데
 時不利兮騶不逝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 달리지 못 하네
 騶不逝兮可奈何   오추마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하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그대 또한 어찌 할꼬.



 형양성에 고립된 유방을 죽이기는커녕 천하의 전략가 장량의 계교로 숙적과 천하양분의 조약을 맺은 초패왕 항우. 조약을 그대로 믿어 철군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사기가 떨어진 초나라 군대를 수십만 대군으로 포위해버린 한신. 해골을 구걸한다는(乞骸骨) 역사상 가장 기막히게 멋있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패왕 곁을 떠난 범증은 이미 이리 비참한 파국이 닥칠 줄 짐작했었겠지. 해하성에서 사랑하는 아내 우희와 마지막 잔을 나눌 때 항우는 알았다. 우희가 목을 찔러 자살을 해버릴지. 사방에서 구슬픈 초나라 노래가 퉁소소리로 들려오고, 오랜 전쟁과 포위된 전황에 사기가 무너진 초군들이 속절없이 탈영하는 걸 본 패왕은 죽기로 한신의 군대를 뚫고 오추마와 함께 오강에 도착한다. 이때 오강에 나타난 나룻배 한 척. 패왕은 “우희여, 우희여, 이를 어찌할꼬.” 노래하고, 보검을 꺼내 자신의 목을 찌른다. (패왕이 노래하는 곳은 사실 오강이 아니라 해하성이다. 그리하여 노래 제목이 해하가垓下歌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도 해하성인데 내가 그냥 이렇게 만들었다. 더 근사하잖아?)
 역사상 패왕 항우는, 천생 군인으로 스스로 총명하며, 총명한 인간들이 가끔 그렇듯, 고집불통이기도 한데다가 성격이 잔인해 남의 사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역사는 이긴 자, 살아남은 자, 기록한 자의 것이라 실제보다 훨씬 더 패왕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그려왔을 수도 있다. 심지어 전한 시대의 역사학자 사마천조차도. 한나라의 시조가 유방이니 그의 숙적을 좋게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팩트’를 보더라도,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 장군 휘하 투항군사 20만 명(중국인들의 위대한 과장법!)을 생매장 했으며, 진을 멸망시킨 후 망한 나라의 황제를 살려둔 유방과 달리 마지막 황제 자영을 참형에 처했으며(유방이 이랬다며. 내 손엔 피 안 묻힌다!), 당시 중국의 막대한 재화와 인력을 쏟아 부어 지은 아방궁을 불태워버렸다. 군대의 장군으로는 그의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어 일찍이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나, 독선과 너무 곧은 군인정신으로 충일한 항우는 애초부터 대륙의 통일제국을 다스릴 그릇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 책에서 항우는 자신이 군인이고, 시인이며, 사나이라고 선언한다. 즉 극작가 판쥔은 기존의 항우와는 다른 인물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진나라의 명재상 (그러나 환관 조고의 모함으로 허리가 잘려 죽는 요참형을 당한)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와 일전을 앞두고 싸우기보다는 투항할 것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유는 이를 거부한 채 항우의 칼을 잡고 자신의 가슴팍울 스스로 찔러 죽는 것으로 연출했다. (24쪽에 항우가 이유에게 하는 대사에 이런 것이 있다. “나는 자네를 괄목상대해야겠네.” 조금 의아했음. ‘괄목상대’는 항우 죽은 지 500년 쯤 지나 쓰인 진수의 <삼국지>에서 오吳나라 여몽을 보고 노숙이 한 얘기 아니었나?) 당시 초나라에서 왕을 먹고 있던 인물이 패왕 항우가 아니라 회왕懷王(진 멸망 후 ‘의제’라고 호칭하는 인플레현상 벌어짐)이란 좀 어리띨띨한 작자였던 바, 진나라 도읍 함양 공격군의 상장군에 ‘송의’란 게으른 인물을 임명했는데, 이 송의가 전쟁에서도 적극적이지 않아 이웃한 조나라 백성들이 죽어 자빠지는 광경을 보다 못한 차장次將 항우가 상장군 송의를 단칼에 베어 죽인다. 즉, 이유는 스스로 자살을 했고, 송의를 참한 것은 조나라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비겁한 장수를 제거했다는 해석. 그 외 패공 유방의 생명을 노린 “홍문의 연회‘, 형양성 전투 등에서 초지일관 계속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정의로운 길만 가려는 태도들을 보여주고 있다.
 설명의 방식은 항우가 한 면은 검정색, 다른 면은 붉은 색 망토를 입고 출연해, 붉은 색은 살아있는 항우, 검정색은 유령 상태의 패왕으로 나와, 홍문의 연회에서 조카 항장項莊의 칼춤을 꾸짖거나, 유령이 되어 2천년이 지난 연회에서 자신이 왜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젠 세월이 많이 흘러, 항우는 초나라 고위 군인 귀족 명가의 자손으로 명예를 존중한 엄정한 장군이었던 반면 한 여인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로맨티스트 적인 성향도 곁들인 좀 까다로운 인간이었고, 유방은 작은 동네 패군 출신의 농투성이였지만 하라는 농사는 짓지 않고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동서이자 충직한 부하장수였던 번쾌의 직업이 개백정이었던 건 그냥 참조만 하시라) 때를 만나.... 어느 날 재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탈영을 하고 집단을 이뤘는데, 그게 커져 나중에 황제의 위까지 오른 행운아, 풍운아쯤이란 건 다 알고 있다. 판쥔은 이런 거 다 필요 없이, 상장군 혹은 패왕의 자리에 오른 “인간” 항우의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한 위대했던 인물의 인간적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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