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남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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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사용법>,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에 이어 네 번째 읽은 페렉. 여태까지 읽은 페렉과 조금 다르다. 2인창 소설이며, 소통하지 않는 현대 젊은이의 미분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 1960년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 누보로망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조재룡이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보니 첫 마디 비슷한 자리에다, “조르주 페렉은 필경 사르트르와 누보로망, 이렇게 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 썼다. 사르트르는 모르겠고, 다만 하여튼 글의 여러 부분이 로그브리예나 뷔토스의 것들과 “문장 간 유사성”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포스트’를 누보로망 앞에 붙인 것은 페렉이 <잠자는 남자>를 쓴 시기가 누보로망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1967년이라서 이었을 뿐이다. 괜히 잘난 척 더 하다가 나중에 코피날 거 같다. 난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있지도 않고 그냥 주워들었을 뿐이며, 몇 작품을 읽다보니 페렉의 선배작가들과 유사성을 느낀 수준, 즉 진정한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설 하나를 읽는데 지식이 뭐가 중헌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일단 내 주장대로 이 작품을 누보로망(비슷한 것)이라 가정하면, 그것도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잘게 쪼개 현미경을 통해 본 것을 기록했다면, 일단 지독하게 드라이한 작품이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은 또한 타당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서간체가 아닌 2인칭 소설이란, 화자가 ‘다중의 독자’가 아니라 오직 ‘너’에게만 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화자가 관찰한 ‘너’의 행동 또는 행위를 묘사하는데 국한한다. 화자는 결코 ‘너’의 대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까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지 책의 처음 두 문장을 인용해보자.


 “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방의 저 익숙한 박명薄明에, 세세하게 나뉜 어두운 체적이, 네가 수천 번을 지나다녔기에, 힘들이지 않고서도 네 기억만으로 길을 알아낼 수 있는 그곳에서, 불투명한 사각 창으로부터 그 길들을 되짚어내고, 반사광으로부터 세면대를, 조금 더 명료한 책 한 권의 그림자로부터, 선반을 되살려내면서, 이보다 더 검은, 걸려 있는 옷가지의 뭉텅이가 또렷이 확인되는 그곳에서 이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네 콧등 위로, 온전한 직각은 아닌 것 같은, 네 두 눈의 두덩 위로 아주 작은 일각一角을 드리울, 또렷한 테두리도 없는 어떤 그림 한 점과도 같은, 얼핏 보아 일률적으로 회색이거나, 색깔도 형태도 없어, 네게는 오히려 무채색으로 보일 수도 있을, 그러나, 재빠르게 형성될 것이 또한 분명한 그런 그림과도 같이, 이차원의 공간 하나가,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지니면서 나타난다: 첫째는, 네가 다소 힘을 주어 네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정도에 따라, 보다 정확히 말해, 네가 눈을 감을 때 네 눈썹 위에서 행해지는 근육의 수축이 네 몸 전반에 평면의 기울기를 변형시키는 것 같은 효과를, 마치 네 눈썹이 네 몸에서 접점을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같이,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니, 이 귀결이 자명하다는 것 말고는 증명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네가 지각할 어둠의, 밀도 혹은 특질을 변형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공간이 다소 흐려진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하 하략. 아직 반도 안 썼다)”


 파리에서 “하녀의 골방”이라 일컫는 방. 대개 건물의 꼭대기에 있으며 20세기 초반까지 주로 하녀들이 기거하던 작은 방. <라 보엠>의 미미가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을 수놓으며 살았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드니즈 보뒤 양이 숱한 백화점 점원 아가씨와 함께 산 곳. 이제 하녀들이 없어져 방은 가난한 빈민들의 차지가 됐고, 파자마 하의만 입고 침대로 사용하는 장의자長椅子 위에 앉아 112쪽이 펼쳐진 책 <산업사회 강론>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너’는 오늘도 누구와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한 채, 옆방의 누군가가 기침을 내뱉고, 발을 질질 끌고, 가구를 옮기고, 서랍을 열고, 층계참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는 소음이 들린다. ‘너’가 세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 받는 신호이며 책의 결말부로 가면 자신의 신호 역시 옆방의 기숙인이 느끼고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소통의 가능성’으로의 소음이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이다. ‘너’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하게 무시하고, 아무 때나 파리의 모든 곳을 탐색하고, 하루에 15프랑을 사용하는 것만 허용하는 삶을 산다. 매일 똑같이. 골루아즈 담배 한 갑, 성냥 한 통, 식사 한 끼, 영화 한 편, 영화관 안내인한테 주는 돈, <르 몽드>신문, 커피 한 잔. 나머지 돈으로 건포도 빵 하나 또는 바게트 반 조각으로 때울 두 번째 끼니와 두 번째 커피 한 잔, 교통비, 치약, 세탁비 등등.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누보 로망으로도 읽을 수 있는 현미경적 묘사와 이에 따른 건조한 문장. 소통을 거부하며 사는 젊은이의 행위 묘사로만 채워지고, 나중엔 옆방 남자와의 신호로 소통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란 가능성. 심지어, 세상과의 화해? 그건 직접 읽어보시고 해결하시기 바람.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는데, 이 의견을 덜컥 믿고 쉽게 구입하지는 마시라. 고백하거니와, 쇤네는 20대 초반부터 잘난 척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읽히지도 않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을 읽었으며, 읽다가보니 20대 초반이라는 시절이 특별히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 감수성 또는 흡수력이 있는 시대여서 그랬는지, 별 내용 없는 건조한 책들을 매우 심각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였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이퍼 레알리즘 적인 묘사로 일관한 이런 책에 여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 페렉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경우일 뿐이라는 걸 딱 꼬집어 미리 말씀을 드리는 바, 정말 책을 사서 읽고 후회하신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책 뒤의 “역자 해설”마저 읽어보시면, 내가 지금 쓴 독후감이 얼마나 엉터리인줄 단박에 알아채실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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