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영감의 열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
류진윈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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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류진원이 1938년생. 우연이겠지만 소설가 다이허우잉과 같은 해 출생했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도 비슷하다. 다만 소설가 다이허우잉의 경우엔 그의 수작(나는 놀라운 작품이란 뜻으로 “경작”이라 하고 싶은) 세 편이 다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격랑 속을 어렵게 헤치며 부패하거나, 절망하여 파멸하거나, 극복하는 광경을 담았다면, 극작가 류진원은 <개똥영감의 열반>에서 소작농 출신의 전형적인 중국 평민이 굴곡 심한 역사에 휩쓸려 뒤집히고 자빠져 결국 제목처럼 열반에 드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류진원의 작품은 이것 하나만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면, 북경대학 중문과를 수료한 후 당의 배치에 의하여 16년 동안의 농촌생활 경험을 지니게 된 작가가 비슷한 드라마를 여럿 만들었다니 그리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판 그리스 신화 같은 희곡 <뇌우>를 쓴 차오위가 이이를 아꼈다고 한다. 내가 알았던 중국인 희곡 작가가 차오위와 라오서, 가오싱젠, 딱 세 명이었는데, 이들이 이리저리 엮이는 걸 새롭게 아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독후감 본론으로 들어가, 열반을 한 개똥영감. 열반이라는 불교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것으로, 중이 죽는 거. 입적入寂과 같은 말. 그리고 다른 뜻으로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불교의 궁극적 실천 목적”이라 나와 있으며 비슷한 말로, “비르나바”, “대적정”, “멸도滅度”가 있단다. 저 오대산 중턱에 가면 적멸보궁이란 곳이 있다. 불교에선 그리도 열반에 대한 강박/갈망이 있는 걸까. 난 불교에 대해서도 완전 무식하다. 그래도 아무리 ‘열반’이 불교의 완벽한 실천 목적이라 하더라도, 산길을 가다가 중을 만나 두 손바닥을 붙여 합장한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며 “스님, 열반하세요.”라고 인사하면 귀싸대기 얻어터지겠다는 건 짐작할 만하다. 근데 뭐라 인사해야 하나? 소설책 보면 “성불하세요.” 대강 이렇게 말하는 거 같기는 한데. 중이나 신부, 목사들 만나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생까버리는 게 최고다. 그러면 적어도 나중에 지옥의 유황불엔 떨어지지 않을 듯해서. 근데 가만 생각하면, 불생불멸의 법칙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할 거 같다. 그렇지 않고 산 상태에서 열반에 드는 일은, 해당자가 미치면 되지 않을까? 죽은 상태나 선한 광인의 상태나 그게 그거니까.
 그럼 다시 개똥영감으로 돌아오면, 개똥영감이 죽었다는 얘길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불생불멸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일까. 결론은, 별로 두껍지 않으니 직접 읽어보시고 스스로 내시라는 거.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개똥영감은 미친 상태로 등장하니. 즉, 처음부터 열반의 상태일 수도 있고, 나중에 어찌하여 진짜 열반, 즉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이 희곡을 1985년 가을에 썼단다. 그럼 독자 혹은 연극의 관객이 작품을 읽거나 본 다음에 각자 알아서 결정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이른바 열린 결말이라는 장치. 이때 개똥영감의 나이가 75세 가량이니 어느 열반이든지 다 어색하지는 않다. 더구나 일찌감치 우리의 주인공 개똥영감은 이미 미친 상태, 즉 광인의 반열에 올라 벌써 죽은 공산주의에 의한 해방 전 지주 치융니엔의 귀신과 대화를 비롯한 접신도 가능하며 심지어 함께 술잔도 기울인다. 젊은 시절 치융니엔의 집에서 머슴을 살 때, 융니엔이 개똥이를 문루에 매달고 물에 적신 삼줄을 채찍삼아 등짝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때린 적이 있어 이 문루에 대한 애증이 대단하다. 일찍이 일본과의 전쟁과 이어진 내전 당시에 치씨 가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갔을 때, 개똥이 혼자 남아 드넓은 평야의 익은 곡식을 추수했던 적이 있다. 그리하여 개똥이 혼자 넓은 평야에 가득한 참깨를 털어 항아리란 항아리, 심지어 신발에까지 참기름을 그득하게 재워놓을 수 있었으며, 참기름에 튀긴 꽈배기를 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정도였단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철수하고 백군을 지지하는 환향단還鄕團이 몰려와 졸지에 생사가 왔다 갔다 할 때, 개똥이가 득달같이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곳이 공산당 팔로군. 흠. 그러니 무대는 틀림없이 중국의 북쪽 어느 촌 동네렸다. 그렇게 공산당에 의해 해방이 되자, 치씨 집안은 동네 빈민들한테 균등하게 배분이 되고, 치씨는 당연히 마을의 가장 저급의 출신성분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때, 개똥이는 치씨 가문의 부동산 가운데 애증의 대상이었던 문루를 차지한다.
 전쟁 중에 땅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 작지만 좋은 땅을 구입한 개똥이는? 불행하게도 공산당에 의한 토지 몰수를 피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넋이 나가버린다. 광증이 생긴 것. 이때부터 개똥영감은 새로 얻은 젊은 아내도 못 알아보고, 대신 이미 최하급 출신성분인 치융니엔의 귀신을 볼 수 있게 된다. 한 부지런하고 천생 농사꾼인 개똥영감을 미치게 만든 중국의 근대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문화혁명을 준비하고, 이어서 개방과 현대화를 이루게 되는데, 조금씩, 조금씩, 이것들이 다 모여서 결국 결정적으로 이미 살짝 미쳐버린 개똥영감을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든다. 세상 어느 곳보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친 중국의 20세기를 관통해 삶을 산 개똥영감. 그리하여 영감은 기어이 문루에 불을 붙이려 성냥을 긋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치융니엔 귀신은 옆에서 쓸데없는 나발이나 불어대고……. 그게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농촌지역 보통의 중국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됐던 간에 열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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