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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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오디오를 껐다. 비록 시인이 시 속에서 베토벤과 바흐를 인용했을지언정, 시편들이 내게 준 감정이 흩어지길 바라지 않아서. 마흔 해가 넘도록 서울 토박이로 살다가 느닷없이 하행선을 타고 해남 미황사 아래동네로 거처를 옮긴 시인. 해남엔 내가 가 본 절집이 두 군데 있다. 큰 절 대흥사와 저 꼭대기에 금천이란 금빛 나는 샘이 있다는 달마산 중턱에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절집 미황사. 내 기억 속 미황사는 씩씩하게 근육이 울퉁불퉁한 중들과 갓 낳은 송아지만한 개, 그리고 매끄럽게 깍은 나무 기둥으로 오랜 대웅전 앞에 신나게 불사 중이던 바쁜 절이라는 거. 하긴, 거길 다녀온 지 벌써 20년도 훌쩍 넘어버렸으니 이젠 당시에 짓고 있던 건물들도 오래된 티가 나겠구나. 차 두 대가 비켜 지날 수 없는 좁은 시멘트 도로를 타고 절 아랫동네 이른바 사하촌을 거쳐야 갈 수 있었던 절집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여태까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었다가, 김태정의 시집을 읽고는 무척 가보고 싶어진다. 서울 토박이가 해남, 이 미황사 아랫마을로 이사가서 만 마흔여덟 살 되던 해에 짧은 생을 마치고 만다.
 그러나 나는 시를 읽는 독자로서 시인의 죽음에 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겠다. 세상에 김태정 혼자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 죽는 건 아니니까. 다만 시를 읽으면서 예전의 미황사를 다시 깊게 생각하게 만들만큼 시들이 내 마음 속에서 공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김태정의 시는 가난하고 궁핍하다. 그러나 이런 시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 가난하고 궁핍해서 급기야 궁상맞기까지 한 골짜기로 들어서지 않는다. 이 기묘한 경계선의 이편에 서는 일. 곤고하고 고단한 시인의 삶을 김태정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시인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맞는 첫 작품부터 예사롭지 않게 읽었다. 감상해보자.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서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전문)



 제목에서부터 시인은 이십년 동안 그 위에서 시도 쓰고, 책도 읽고, 밥도 차려먹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도 아니고, 술 마신 애인이 발로 걷어차서도 아니고, 이젠 시인이 포마이카 상 앞에서 더 이상 거짓으로 시도 쓰지 못하겠고, 삼시세끼 자신의 초라한 끼니를 구경시키기도 쪽팔려 이젠 스무 해 동안 정든 밥상이자 책상인 너를 버릴 때가 됐다는 거다. 결국 시도 안 되고, 다른 밥벌이도 안 되는 시인의 초라함 또는 자존심이 포마이카 상을 버리는 것으로 결심을 하여, 시는 궁상스러움이란 다모클레스의 검으로부터 비켜서게 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적어도 한 명의 독자인 내게 시를 쓰는 어려움과 시인으로의 생활인이라는 곤고함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나는 어리석게도 마음 한 구석에서 <조침문弔針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바람은 소박하다. 삶은 언제나 팍팍한 것이라 애초부터 풍요라는 게 자신의 팔자에 없음은 사십 년에 가까운 체험으로 익숙하지만 그래도 시골 산촌에 자그마한 공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전문)


 
 시인이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의 윤씨 할머니댁에서 방을 얻어 살았던 모양이다. (55쪽 <달마의 뒤란>에서 인용) 그래 자주 미황사에 들렀을 테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달마산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한 거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만일 올랐다면, 시인이 병풍같이 생긴 바위산에 올라 보길도를 비롯한 올망졸망한 남해의 그림 같은 시를 한 수도 쓰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리라. 미황사 경내를 산보삼아 다니던 시인은 절 근처 모르는 나무도 없고, 풀도 없으며 들꽃 이름도 다 알았을 터. 그렇게 다니다 해우소에 들러 삶의 즐거운 안간힘을 동반한 똥을 누면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이 절집의 소박한 화장실 같은 집이라면 아주 딱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시 속에서는 더 이상 시를 쓰는 어려움이나 시를 써서 먹고 사는 생활의 곤고함은 보이지 않는다. 병이 깊어갔으리라. 그러나 조금의 엄살도 없다. 이른바 요새 몇몇 시인들이 주장하는 ‘병시病詩’라는 집단하고는 고급지게 다르다. 소박하게 그냥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자그마한 집 하나가 산골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 병이 깊어 오히려 마음도 깊어가는 한 인간이 나를 울리고 만다.
 시는 삶이어야 하리라. 오직 하나,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독특하고 사치스러운 고통을 최대한의 은유를 써서 끄집어내는 일만 시가 되는 건 아니다. 포마이카 상을 이젠 버리고 싶은 일, 절집의 해우소에 두 다리로 지구를 버티고 앉아 좁은 공간을 바라보는 것도 매우 훌륭한 시의 제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부는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면서 쓴 시를 모아놓았는데 앞쪽의 시보다는 울림이 덜하다. 좋은 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으면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기억하시라.




* 언제나처럼 시집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인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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