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탈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총 스무 편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고, 내가 읽은 일곱 번째 총서이다. 따라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젠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으므로, 시리즈에서 루공 가의 비조鼻祖 피에르 루공의 셋째 아들 아리스티드가 무대 전면에 등장하여, 드디어 이제 막 개화하려 하는 프랑스의 태평성대 벨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의 시발점,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의 파리를 무대로, 기질적으로 유전병적인 집착 혹은 광기가 어떻게 발현될까 애초부터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드 루공은 1851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12월 2일 쿠데타 소식을 듣자마자, 1852년 초에 남부 플라상 지역에서 단박에 파리로 올라왔다. 아들 막심은 할머니 무릎 아래에 두기로 하고, 허약체질의 아내와 딸 하나만 데리고 상경을 하면서, 마치 대한민국의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서울 강남 지역에서 광풍을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부동산 투기의 현장 파리에 뛰어든다. 아리스티드가 갖고 있는 유전병적인 기질은 돈에 대한 집착 또는 광증이었던 거다. 아리스티드가 그냥 맨몸으로 상경했느냐하면 그건 아니어서, 쿠데타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으며 지금도 은밀한 세력을 주도하며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보필하고 있는(소설이 진행하며 장관자리까지 올라가는) 친형 위젠이, 적어도 자기한테 한 자리는 얻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형은 동생에게 시청 말단 공무원자리를 겨우 하나 얻어주었는데, 이 자리가 보통이 아닌 것이, 위에서 얘기한대로 본격적인 벨에포크 시대를 열기 위해 첫 번째 사업으로 벌이고자 하는 도시 재개발에 관한 비싼 고급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리였던 거다. 처음부터 동생의 집착 또는 광기를 알고 있던 위젠 형은 나중에라도 동생의 광기와 자신이 엮일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생의 성姓을 ‘루공’에서 제수(동생의 아내)의 성인 ‘시카르도’ 비슷하게 ‘사카르’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책에선 이 인간의 다섯 글자 이름 ‘아리스티드’ 대신 주로 세 글자 성인 ‘사카르’로 표기하고 있다.
 수년 동안 시청에서 파리 재개발 사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인맥을 키우기 위해 시청 곳곳의 장소와 인물들을 샅샅이 훑어가던 사카르가, 이제 드디어 큰 건을 발견한 찰나, 아뿔싸, 부동산 투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종자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가능하단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야 만다. 조금의 종자돈을 형도 안 빌려줘, 자기 보스인 도시개발과장도 안 빌려줘, 마누라 형제들도 안 빌려줘, 일찌감치 파리에 나와 작은 가게를 하고 있던 여동생 시도니 부인도 모른 척, 정말 마중물만 조금 있으면 펌프에서 우물물 쏟아지듯 하늘에서 금화, 은화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못하는 거다. 아, 안타까워. 원래 그런 거다. 없이 사는 인간들은 기회가 눈에 번히 보여도 그걸 확 잡아채지 못하는 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해 예상치 못했던 도움을 주는 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여동생 시도니 부인. 원래부터 파리의 대표적 마당발이었던 여사가 어디서 뉴스 하나를 물고 온다. 파리의 옛 부유층이 살던, 아 그게 파리 중심가의 무슨 섬이더라, 시테 섬이던가, 하여간 거기서 살던 공화파 법조인, 그러니까 시대적 배경이었던 나폴레옹 3세 시절엔 골수 야당이어서 거의 두문불출했던 인물한테 딸이 둘 있는데, 그중에서 첫째 따님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계속 다니다가 학업을 마치고 이제 집에 돌아와야 하는 순간, 길을 가다가 들판에서 어떤 부잣집 유부남한테 겁탈을 당하고 임신을 한 채 집에 돌아오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큰딸 르네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엘리자벳 고모와, 사카르의 누이동생이자 파리의 왕발 시도니 부인이 연결이 되어, 몸이 약했던 마누라가 죽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카르가 르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거짓)생부이니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고, 사카르가 마침 홀아비 신세라 둘을 결혼시키자고 설득, 정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돈벼락을 맞게 된다. 르네가 지참금으로 수십만 프랑을 가져오는 동시에, 이를 불쌍히 여긴 엘리자벳 고모 역시 비싼 땅을 상속해주는 거였다. 세상 참 불공평한 것이, 어찌하여 나한텐 이런 행운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참. 이쯤에서 한숨 한 번 쉬어도 큰 까탈은 아닐 터, 제위의 양해를 바람.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개발과 아주 유사하게, 이제 전면적으로 파리를 때려 부수고 다시 건설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질 판. 고급 정보와 정신 못 차릴 정도의 자금을 확보한 사카르는, 정신 못 차릴 만한 자금을 정신 못 차릴 만큼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불과 몇 년 만에 파리 중심가에 대규모 저택을 무지 화려하게 짓고, 그러나 문화적 수준은 아직 남프랑스 플라상 촌놈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해 흔하지만 나중에 천문학적 재산이 될 그림 한 장 벽에 걸지 못하면서, 그저 국가를 상대로 국민들 세금 축내기에 혈안이 된다. 문제는 이게 병적이라는 거. 돈이란 건 쓰자고 버는 거다. 그 정도는 아무리 광적으로 돈 벌기에 눈알이 벌건 사카르도 아는 거라서, 젊고 아름다운 아내 르네의 무한정한 사치와 낭비를 눈감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거금을 오직 하나, 아내의 기분전환을 위해 가져다 바친다. 결혼은 했지만 침대 생활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맞지 않아 거의 관계가 없는 상태여서 각자가 서로 알아서 즐기기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당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부르주아 계급의 관례도 칼 같이 지킨다. 심지어 파산한 정부의 다이아몬드를 거액을 주고 사서 그걸 아내에게 선물할 정도. 당시 파리 부르주아들은 이걸 당연시하고 칭찬까지 쏟아 붓는다. 한 여자를 살리는 휴머니즘과, 그리 쉽게 거금을 쓸 수 있는 재력에 반해버리는 거다. 우와, 우리 집 같으면 너 죽고 나 죽는다. 하긴, 그래서 나는 절대 부자가 못되는 것이겠지만.
 그리하여 이 부부가 평생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어디 소설이겠는가. 소설의 가장 중요한 갈등 가운데 하나를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파리에 올 때 할머니한테 맡겨놓은 아들 막심. 막심이 어느 새 열 살이 됐고, 이제 돈도 벌만큼 벌었으니 막심을 파리로 데려오는데, 지금이야 열 살이지만, 얘가 언제나 열 살인 줄 알아? 조금 있으면 머리통 커지고, 머리통 커지는 거만큼 (키 말고)다른 것도 커지고, 어느 날부터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의 유전자를 살포하기 위해 별 짓을 다 할 거 아닌가 말이다. 아니나 달라, 열일곱 살을 먹자마자 계모 르네의 몸종의 배 속에 아이 하나를 담아 놓는다. 르네는 점잖게 몸종에게 연수 1,200 프랑의 재산과 함께 고향 앞으로 보내버리는데, 점잖기는 했지만 참 인색했다, 인색했어. 자신은 의상실 주인한테 15만 프랑 이상씩 빚을 지면서 명색이 손자를 밴 하녀에게 연수 1,200 프랑, 월 100 프랑이 말이 돼? 그렇다고 막심과 계모 르네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천만의 말씀.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다. 여덟 살 차이의 아들과 계모.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나? 뭐라? 페드르? 그렇다. 작 중에서 막심과 르네는 <페드르> 연극을 보는 장면도 나오긴 한다. 하지만 문제는 루공 가문 특유의 기형적 신체조건. 졸라는 막심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루공의 피가 그 안에서 정제되어 미묘하고 사악하게 나타났다. 너무 어린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의 격렬한 욕망과 어머니의 나약함과 체념이 이상하게 결합되고 상충되어 나타난 기형적 산물이 그(막심)였다. 그 안에서 부모의 결점들이 서로 맞물리며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 (183쪽)
 궁금하시지? 여러 번 얘기 했던 바와 같이 졸라 작품의 특징은 “질주”다. 하나는 이야기 했다. 남자 주인공 사카르의 돈에 대한, 오직 돈을 버는 행위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질주. 사카르의 탐욕적 광기의 질주에 대해 졸라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쇠처럼 거무스름한 사카르가 집게 같이 뾰족한 웃음을 띠고 가느다란 다리로 비웃으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욕망 그 자체였다. 십 년 내내 그녀(르네)는 그가 용광로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금속 속에서, 자기 자신도 깔릴지 모를 위험 속에서 불에 달아오른 몸으로 헐떡이며 자기 팔보다 스무 배나 더 무거운 망치들을 들고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 왔다.” (439쪽)
 그리고 또 하나는, 안 알려드림.
 위에서 막심 사카르(루공)의 성격을 인용한 이유는, 막심이 진짜 결혼을 하는데, 상대는 지참금으로 3백만 프랑을 가져오기로 계약한 하원의원 드 마뢰이으 씨의 딸 루이자이며, 루이자에 대한 묘사가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기형적 몸에, 추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는 젊어서 죽을 몸이었다. 일종의 폐병이 그녀를 은밀히 파 들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지나친 쾌활성이나 교태 있는 매력도 그 때문이었다. 197쪽  어머니 쪽을 물려받은 루이즈는 부족한 피, 비틀린 수족, 손상된 뇌, 이미 추잡한 생활로 가득 찬 기억들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198쪽)
 그래서 혹시, 막심과 루이자가 결혼을 해서 사이에 나온 아이가 정말로 혹시 <목로주점>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는데, 그건 아닌 거 같다. 하여간 이 루공 마카르 총서는 이렇듯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조금씩 관계를 알아채거나 오해하는 즐거움도 아주 독특하다. 이 책 <쟁탈전:La Curée>의 제목을 또 다른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하나인 <돈>을 번역한 유기환은 <이전투구> 즉 진흙탕 개싸움이라고 한 바 있고 <돈>의 주인공이 이 <쟁탈전>의 주인공인 사카르인 것으로 미루어, 총서 가운데 두 번째로 쓴 작품이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연결될 것이 틀림없으리란 것만 얘기한다. 즉, 뒤끝이 있는 소설이란 뜻?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