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타, 이탈리아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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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까닭은 결코 다시 살 수 없는 삶을 잠시 멈춰놓고, 인생의 축소판 같은 여행으로 예행연습을 해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친구들끼리는 일정 나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행계를 들기도 한다.

저자는 50에 찾아온 갱년기를 돌파하기 위해 앞으로의 10년을 잘 보내고 환갑 여행을 하기 위해 친구들과 계획을 세운다.

셋이서 떠나기로 한 여행은 우여곡절 끝에 58세에 둘이서 떠나는 여행이 되었다.

이탈리아로...

 

이금이 작가는 동화 작가이다.

그래서인지 이 여행 에세이는 천진난만한 글체로 읽혀서 여행의 순수한 기쁨과 열정이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해진다.

밀라노에서 첫 여행을 시작하려던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무슨 여행이든 아무리 계획을 철저히 세워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거나 우울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이 큰언니들의 마음가짐이다.

 

금과 진

두 사람의 이탈리아 여행은 평탄한 듯 평탄하지 않았고, 계획한 듯 계획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35일간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고 있자면 숨 쉴 틈이 없다.

이탈리아에 가본 적도 없는데 이미 다 둘러본 거 같다.

 

마치 언니가 여행 다녀와서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땠고, 거기는 그랬고, 여기는 이랬어~라고 수다를 떨어주는 거 같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 않는 길'을 품은 채 살아간다. 기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 길은 실패한 길이 아니다. 부서지고 무너진 채로도 무대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타오르미나 극장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여행가의 멋스러운 여행기는 아니다.

하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아직 덜 자란 마음을 품고 사는 작가님의 마음으로 본 이탈리아는 가깝고 다정하고, 아름답고, 멋스럽고, 감춰둔 이야기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같이 웃고, 같이 조마조마하고, 같이 안타까워하고, 같이 뿌듯해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 해도

같이 여행을 한다는 건 쉽다가도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짧은 여정이 아닌 한 달이 넘는 여정이라면.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결국 서로의 마음을 서로에게 터놓는 것이다.

 

마흔을 지나면서 오십 되면 기념 여행을 가자며 여행경비를 모으자고 한 친구들도 생각나고

친구랑 여행 갔다가 맘 상해서 한동안 삐걱거렸던 기억도 떠오르고

서로 다른 성향의 여행 감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바심쳤던 기억도 떠올랐다.

한쪽은 다 못 보더라도 천천히 감상하려 했고, 한 쪽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했었다.

이 큰언니들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읽으며 나도 다시 예전 친구와의 여행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고, 반성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기도 좋았지만 뒤에 있는 에필로그가 참 좋았다.

그야말로 몸소 겪은 여행에 대한 알토란 같은 체험의 결과가 담겨 있기에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후 달라진 모습들에게 여행이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물론 이것은 연륜이 남긴 흔적이니 섣불리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으련다.

다만 나도 환갑 전에 여행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장거리 여행을 오랜 시간 다녀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서로를 더 잘 알아가는 시간이 될 테고, 그렇게 영글어 버린 우정은 죽을 때까지 서로의 의지가 될 테니...

 

페르마타는 이탈리아 말로 '정류장', '잠시 멈추다'라는 뜻과 '길게 늘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잠시 멈춤을 길게 늘이게 되는 것. 여행.

여행은 일상을 잠시 멈추는 것이고,

여행의 추억은 인생 내내 되새김질하면서 그때의 즐거움을 길게 늘이게 되는 것이니

페르마타 이탈리아라는 제목은 그녀들의 추억이 길게 늘어나리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가을과 잘 어울리는 여행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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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개정판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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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 담당이다. 죽음이 내 생업의 기반이다.

 

 

'죽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잭 매커보이와의 만남은 그의 쌍둥이 형 '션'의 죽음 앞에서다.

강력계 형사였던 '션'이 자살했다.

어릴 때 눈앞에서 얼음 호수 속으로 빠져들어갔던 누나의 죽음 이후 그는 또 다른 형제의 죽음 앞에 섰다.

강력반을 드나들며 살인사건의 기사를 쓰는 잭에게 죽음은 밥벌이이자 사명감 같은 거였다.

그런 그에게도 형사의 '촉'이 잠재되어 있었을까?

 

스릴러 한 편을 읽었는데 나는 아주 대단한 문학작품을 읽은 기분이다.

'시인'이란 제목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마이클 코넬리'라는 이름만으로 이 책을 선택했으므로

이 작품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1996년 작품이지만 2021년에 읽어도 전혀 오래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시대적 배경이 더 긴장되고 조바심을 치게 만들었을 뿐.

 

어쨌든 나는 그 미끼를 물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내 삶의 모든 것이 변했다. 누구의 삶이든 세월이 흐른 뒤 회고를 해보면 삶의 지도를 분명히 그릴 수 있듯이, 내 삶이 그 한 문장과 함께, 내가 글렌에게 형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한 그 순간에 변해버렸다.

 

잭은 기자로서 경찰 자살 사건 기사를 기획하면서 자료를 수집하다 형의 죽음과 유사한 죽음들을 만나게 된다.

 

공간을 넘고, 시간을 넘어

 

자살한 경찰들은 모두 에드거 앨런 포의 싯구를 유서로 남겼다.

이것이 단순한 자살 사건이 아니라 연쇄살인이라는 느낌을 받은 잭은 기사를 위해, 형을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마치 '션'의 감각을 장착한 것처럼 잭은 FBI도 못 알아낸 사건의 본질을 추적해간다.








"다른 범인들을 이미 봤으니까. 그놈들 눈을 들여다보고, 그 눈 뒤의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버렸으니까. 그놈들을 전부 죽여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 같아."

 

 

잭의 이야기와 범인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나는 두 가지 어둠 속으로 침잠해들어갔다.

죽음의 주변에서 맴도는 잭과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범인의 모습은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표현으로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나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들고, 끝없이 오해하게 만들었다.

 

배신과 함정이 드러나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것조차도 언제 뒤집힐지 모르니까...

 

어쩌면 범인이 죽이고 싶어 하는 건 경찰관인지도 몰라요.

 

 

경찰관을 죽이기 위해 미끼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에게 FBI는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가 포의 싯구를 인용했기에 붙은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범인의 자만심을 높여 줄 '시인'이라는 별명이 제목으로 쓰였지만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야 그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영리하다 못해 영악한 범인

FBI와의 협상에서 독점 기사와 수사에 참여하기로 '딜'을 한 잭이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소아성애자와 다크 앱

상처받은 영혼들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상처를 마련한다.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처럼 느껴지지만 '극복'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가지만, 누군가는 그것에 자신을 내어주고 만다.

 

마지막까지도 나는 범인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인'

마치 어둠의 시인 포에게 포획당한 것처럼

시인은 흔적 없는 살인사건 앞에서 고뇌하고, 좌절하고, 절망스러워했던 담당 형사들을 유린했다.

그리고 "왜?" "어째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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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분의 1은 비밀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금성준 지음 / &(앤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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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는 N분의 1에서 분모 N이 무한대가 되겠군. 이런 식으로 몇 달만 지나면 수두룩한 인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식 나눠줘야 할지 몰라."

 

 

서른아홉 살의 8급 교사 계급 교도관 기봉규와 허태구.

이들은 교도소 영치창고를 담당하고 있다.

수감자들이 들어올 때 맡긴 물건을 모아두는 영치창고.

수감자들이 퇴소할 때 맡긴 물건을 찾아가는 영치창고.

그곳에 눈먼 돈 9억이 들어 있는 트렁크가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다 전근을 가거나 은퇴를 했고, 기봉규와 허태구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트렁크의 주인 김대식이 감옥에서 죽었다.

 

혈혈단신의 치매 노인 김대식은 그렇게 피붙이 하나 남겨놓지 않고 죽었고

그간 영치창고에 맡겨 둔 9억의 트렁크는 기봉규와 허태구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봉규와 허태구는 그 돈을 자신들이 갖기로 한다.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매일 돈을 빼돌려서 밖으로 가져가 숨겨 두었다가 잠잠해지면 쓸 요량으로.

두 사람은 9억을 N분의 1로 나누어 4억 5000천만 원씩 갖기로 한다.

 

과연 그 돈은 두 사람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을까?

 

비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둘만의 비밀은 일파만파 퍼지고 서로가 자기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혼자서 꿀꺽하겠다는 심보로 무장한 사람도 있다.

이 사람 저 사람 숟가락을 들이대는 탓에 퇴근 시간에 조금씩 조금씩 현금을 옮기려던 기봉규만 속이 탄다.

있으나 마나 한 허태구와 온갖 지략(?)을 짜내지만 재수가 더럽게 없는 기봉규의 9억 옮기기 프로젝트는 아주 스피디한 전개로 이어진다.

 

온갖 인간 군상들이 숟가락을 들고 덤비는 모습이 가관이다.

입도 뻥긋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는 허당 봉규와 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치밀하지 않지만 치밀한 거 같고

웃긴 거 같은데 쓴맛이 나고

뭔가 한 방이 터질 거 같은데 싱겁고

싱겁다고 생각했는데 어이없는 상황이 뒷목을 잡게 한다.






마치 그림 속 상황처럼 엎치락뒤치락 9억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징그럽기까지 한다.

9억은 어떻게 만들어진 돈이고

9억의 진짜 임자는 누구일까?

 

중요한 사안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무조건 자기 것을 만들고 말겠다는 욕심 앞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장편 소설들은 가벼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끝을 마주하고 있다.

정신없게 만들어 놓고 허무하게 끝나는가 싶은데 점점이 느껴지는 무게감이 있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끝없는 무게 추를 목에 걸어준다.

한여름 밤의 꿈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9억의 임자 없는 돈.

그들은 과연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을까요?

 

나에게 임자 없는 돈 9억이 눈앞에 떨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처리할까? 를 속절없이 생각해 봤던 이야기 N분의 1은 비밀로.

잠시나마 9억을 손에 쥐고 있다가 꿈에서 깬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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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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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처럼 아름다운 너. 그 말에 현기증 같은 유혹을 느꼈다. 살을 빼고 꾸미면 정말 그 무렵의 나를 되찾을 수 있을까.

 

 

<고독한 늑대의 피>를 읽으면서 제목의 느낌이 온전히 녹아있는 이야기의 느낌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작가 이름은 기억 못 하면서 책 제목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달콤한 숨결>의 작가가 고독한 늑대의 피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서 설레었다.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우며 해리성 장애를 겪고 있는 평범한 주부 후미에.

그녀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동창생을 만나게 된다.

가나코는 후미에에게 자신의 얼굴 상처를 보여주며 자기 대신 화장품 사업의 얼굴마담 역할을 맡아주길 간절하게 요청한다.

후미에는 왠지 다단계 느낌이 나서 꺼렸지만 가나코가 준 화장품을 써보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아름다웠던 시절, 빛나던 시절, 그 시절의 후미에는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적한 별장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여형사와 짝이 된 하타는 단서가 별로 없는 피해자의 행적을 쫓기 위해 발품을 판다.

하지만 피해자는 어디에도 연결고리가 없고, 별장 주변에서 목격된 선글라스 여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과연 하타는 이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동창생이 던진 미끼를 물지 말지 고민하는 후미에의 이야기와 살인사건의 단서를 추적하는 하타의 이야기가 번갈아 이어진다.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는 후미에는 가나코를 만나고 나서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거의 예전의 모습을 찾아간다.

자신감과 더불어 경력단절의 여성에서 다시 사회로 복귀해가는 후미에는 자신감을 되찾으며 생활에도 활력이 생긴다.

 

무뚝뚝하지만 형사의 기본에 충실한 하타.

하타는 여성 동료와 짝이 되어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의 경직된 구조 안에서 여형사의 위치란 것은 상당히 미비하다.

그래서 나쓰키의 등장은 그동안 일본 경찰 소설에서 다루어졌던 여형사와 조금 결이 다르다.

 

<달콤한 숨결>에선 새로운 감각의 향이 나풀거린다.

얼마 전 읽은 <버터>에서도 느꼈지만 일본 여성작가들의 목소리는 경직되고 답답한 일본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그려내는 여성상은 사회에서 부여한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사회적 압박을 극복해 내는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이야기 속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관심을 끌고, 응원하게 되고, 지지해 주고 싶어진다.

그들이 범죄자라 해도 말이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의 세상을 깨고 나와야 하는 알 속의 아기 새가 되어야 한다.

 

이 사건의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오랫동안 갈고 닦인 형사의 감이 하타에게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끈질김.

형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끈질김이다.

윗선에선 손쉽게 눈에 띄는 용의자를 검거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하타에겐 무언가 미심쩍은 '촉'이 있었다.

뭔가 가려져서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존재하는 '악'

그것을 위해 발품을 팔고, 단서를 찾고, 조금씩 조금씩 본질에 다가가는 하타의 모습은 독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준다.

 

<달콤한 숨결>

원제는 네펜테스라는 식물 이름이다.

항아리 같은 모양의 자루에 달콤한 꿀을 담아 놓고 그 향기에 이끌려 들어온 벌레들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거저 내게 오는 것은 없다.

커다란 행운마저도...

뭔가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인간사다.

달콤한 숨결은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외롭고, 슬픈 영혼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마음에 신뢰를 심어 놓고 단물을 쫘~악 들이키고 난 다음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리는 '악'

덫인 줄 알면서도

타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불만 보면 날아오는 불나방 같은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범죄 이야기이자

나쓰키를 통해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자립해가는 씩씩한 여성상을 함께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다.

 

모든 완벽함도 긴장감이 사라지면 우쭐하게 마련이고

우쭐하다 보면 실수하게 마련이고

실수조차도 실수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 완벽함의 끝에 서게 되는 것이다.

범인은 긴장감을 풀어버리는 동시에 잡히게 마련이다.

 

갑자기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할 것.

기억도 안 나는 동창이 나를 너무 잘 기억한다면 경계할 것.

너무 큰 행운을 동반한 사람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

 

달콤한 숨결을 읽으며 다짐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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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하미나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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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아주 많은 곳에 인덱스를 붙이게 된다.

이유는 나 자신이 병원에 가서 느꼈던 수많은 느낌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호르몬 때문이야."

"너무 예민한 거 아니니?"

"괜히 엄살 부리는 거 아니지?"

"갱년기라 그래."

"오춘기가 왔나 보다!"

 

이런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진다.

그런 말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 주변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 이해하려 한 적 없고, 보듬어 볼 생각도 안 하고, 원인이 뭔지를 알려고 해보지도 않으면서 무심하게 내뱉는 말들이니까.

 

우울증, 조증, 불안증, 공황장애, 기타 등등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과 고통들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병명이다.

설사 위의 병명이 가리키는 증상과 일치하지 않더라고 아무 병명 없이 아픈 것보다는 저런 병명이라도 있어야 위안을 받는 것이 환자다.

이 책을 쓴 저자 하미나 역시 조울증 환자다.

본인이 겪는 고통을 뚜렷하게 치료되지 않는 상황들을 더 이상 방치하기 싫어서 스스로 공부하고, 비슷한 증상의 여성들과 수많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써낸 결과물이다.

 

나랑 상관없는 얘기네.

정말 그럴까?






우리는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극심한 고통은 기억을 와해시킨다. 우리는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기억이 무너지면 자아도 와해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산산이 무너지고 흩어진 기억을 모아 재구성하며 시작된다.

 

 

이 책은 우울에 대한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직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쓰여진 책이다.

 

2부에서 읽게 되는 여성들의 개인사는 폭력과 학대로 인한 상처를 복기하는 일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최초의 폭력이 시작되는 곳이거나 폭력과 맞닥뜨리는 곳이다.

엄마에게 가해지는 아버지의 폭력,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주먹과 언어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 동심은 그 자체로 우울이 된다.

그렇게 쌓여 온 감정들은 표출되지 못하고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들이 고통으로 아우성치며 몸 여기저기를 공격하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난장에서 함께 미쳐 뒹구는 동안, 아빠는 난장의 원인을 제공했으나 그곳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피해 간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발현되는 정신질환을 가족 내의 문제로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 또한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가정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대목에서 나는 통쾌함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폭력이 "사랑이 가득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가. 또 이렇게 가족 안에서 형성된,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은 상처는 대물림되기 쉽다. 우울증의 가족력이란 비단 유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엄마가 1차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자신의 고통 앞에서 아이들까지 돌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만만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울분을 덜어내었을 것도 같다.

그것도 아들보다는 딸이 더 만만하기에 딸에게만은 자신의 감정을 분출했던 것이 딸에게는 더 많은 상처를 가져다주는 결과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은 채로 뭉뚱그려서 "우울증이나 조울증"으로 명명하고 만다.

우울증이 어른에게만 통용된다고 생각하지만 우울증은 꽤 어린 나이에서 출발한다는 사실도 이 책이 알려주고 있다.

학교와 직장에서 얻는 정신적인 폭력도 많은 사람들에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가해자는 모르는 피해자의 상처는 그렇게 계속 복제된다.

 

'한국에서 네가 너답게 살려 하면 결국 죽게 돼.'

 

 

동년배 연예인의 자살은 그들에게도 상처가 되었다.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받았던 질타들이 결국 그들을 사지로 몰아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가정, 학교, 데이트 폭력과는 또 다른 사회적 폭력 앞에서 많은 여자들이 좌절하고, 꺾이고, 숨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자긍심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을 수용하고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 이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지나온 궤적들이 꺼내기 어려운 기억 속에서 멈춰 있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총 31명의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들이 이제라도 이렇게 목소리를 내어 준 것이 고맙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로 묵살되었고, 까다롭고, 예민하고, 잘난 척하고, 불란만 일으키는 존재로 다뤄져 왔다.

 

세상이 변하고 여성들의 지위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러나 고통에 머물지 않고, 원인을 찾아내고, 들여다보며, 치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그녀들 때문에

미처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을 그녀들에게도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이유를 모른 채 몇 년을 아팠습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았어요. 제 마음의 폭풍은 작은 바람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것을요.

 

 

처음엔 우리 '둘'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였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쉬고 싶은 우리'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미.괴.오.똑.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모든 그녀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해받지 못하고 돌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읽어 봤으면 좋겠다.

이 세상은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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