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경 작가의 6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첫 창작집 '수화'는 육체와 영혼의 고통에 신음하는 인간군상의 삶을 추적합니다. 개인내면의 진술에 의존하던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세상과 격리된 다양한 인물들의 아픔을 치밀하게 그려냈습니다. 작가는 단순한 개인사적 고백을 넘어 '거짓 희망'과 '가짜 위안'에 매달리지 않고 고통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꿰뚫는 빛나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제작 '수화'는 경쾌함을 특징으로 하는 물비늘 같은 신세대 문체의 그물로 인생의 깊은 트라우마를 애틋하게 건져올린 수작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저자는 이 작품 하나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의미 있는 몸짓을 해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서른아홉이 되도록 독신으로 지내며 차가운 방 한구석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여자의 내면에 대한 극렬하고 밀도 있는 묘사로 시작됩니다. 신년 연하장에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썼다는 나쓰메 소오세키의 연보를 작성하며 나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사내는 기승전결의 완미한 구조를 가진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덜 익은 생선의 뱃살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것 같은 비릿한 역겨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삶은 여전히 그냥 삶일 뿐이야, 라고 사내는 어느때부턴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생선이 날것으로 있든 아가미까지 다 구워져 딱딱한 단백질 덩어리로 놓여 있든, 생선은 여전히 생선인 것처럼. 사내는 통찰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삶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은유화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사내는 삶은 꿈이고 영화는 해몽이라고 생각한다. 꿈보타 해몽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화경의 작품 속에서는 따뜻하고 공고한 가족 관계는 허상으로 그려집니다. 작가는 가족 관계의 이면에 놓인 지극히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의 틀로 구성원들을 몰아넣으려는 억압적인 측면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한 고통에 맞닥뜨렸을 때 쉽게 해체되어 버릴 수도 있는 가족의 모습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펭귄클래식 표지에는 수많은 명화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작품들 속에 숨겨진 명화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별이 빛나는 밤에'(1889)고흐가 예술가로서 정점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작품입니다. 고흐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싱어송 라이터 돈 맥클린은 이 그림을 본 뒤, 고흐의 생애를 떠올리며 'Starry Starry Night'이라는 곡을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품들이 이 이미지를 활용하여 탄생하였으니 현대인과 현대 문화는 이 그림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작품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밤이 지닌 숨겨진 생명력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밤에 별과 달은 내재된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우리에게 우주의 비밀을 폭로합니다. 우주의 살아 있는 비밀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은 삶을 긍정하고 진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연상시킵니다.

 

 

 

'전원교향악' - 앙드레 지드

 


36세의 나이로 요절한 이탈리아 태생의 친재 유태인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삶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던 여러 병마와 그 속에서도 이어진 작품 활동, 그리고 죽음까지 함께했던 잔느 에뷔테른과의 사람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는 비극적인 예술가의 전형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주로 초상화만을 그렸는데 모델은 이웃이나 지인, 창녀들이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초상화 속 인물들은 아몬드 같은 독특한 눈, 꼭 다문 입술, 왜곡된 코, 길게 늘어진 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원 교향악'의 표지에 쓰인 '갈색 머리의 소녀'는 왠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는 장님 소녀 제르트뤼드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전 세계에서 여성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여성들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를 취해서 그가 그린 여인은 성녀, 아니면 요부였다고 합니다.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은 클림트의 대표적 작업 스타일인 금박을 사용한 그림으로서 화려하며 웅장합니다. 나치 정권 시대에는 히틀러의 소장품이기도 했으니 당시 화가로서의 클림트의 명성과 인지도가 어땠는지를 말해 주는 작품입니다. 클림트는 살아 생전에 작품으로 부유하게 살았던 흔치 않은 예술가였습니다. 상류층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는데 이런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여인이 아델 블로흐바우어였습니다. 그녀는 클림트가 가장 선호했던 모델이자 후원가였으며 클림트와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던 엄청난 부호의 안주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노예가 되고자 하는 한 남자의 초상을 담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주인공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민서 작가의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이십대 여성의 일상을 그린 '칙릿소설'과 88만원 세대의 '백수소설'이 만난 한 편의 성장소설입니다. 칙릿소설 고유의 리듬과 유머가 살아 있어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 경쾌하고 발랄하게 읽히면서도 그 속에 성장소설 고유의 감동과 깊이 또한 담고 있습니다. 섹스 문제와 직장에서의 갈등, 여자 친구들 사이의 질투, 강남 지향의 속물근성, 젊은이들의 세태 풍속도까지 이십대 여성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칙릿소설의 전형을 따르는 듯싶다가도 대학을 스트레이트로 졸업하고 꿈도 찾지 못한 채 치열한 경쟁 사회로 내던져진 88만원 세대의 서글픈 현실과 맞물리면서 솔직한 이야기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목동에 거주하며 강남을 지향하는 스물네 살의 여성과 그녀 주변의 대조적이고 다양한 친구들이 보여주는 고민과 삶의 면면을 통해 눈에 튀지는 않지만 위험부담도 적어 어떤 성격의 모임에서나 무난한 블랙 미니드레스처럼 남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진지하고 중요한 모험과 변화는 두려워하는 이십대 여성들의 내심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매사에 간섭을 일삼는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강남의 클럽에서 밤을 지새우면서도, 부모님처럼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꿈을 찾지 못한 이십대 여성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첫 소설임에도 탄탄하게 다듬어진 문장력과 현실을 예리하게 관찰해 적재적소에 풀어내는 저자의 필력 덕분에, 키득키득 웃으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십대를 거쳐 갔거나, 이십대를 기다리거나, 지금 이십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잘 짜인 구성 속에 유머와 위트,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어 이십대를 다룬 가장 솔직한 소설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수사력을 갖춘 커크릴 경감 시리즈를 통해 이미 외국 추리소설 팬들에게 골든에이지의 뛰어난 작가로 칭송받고 있는 크리스티나 브랜드의 '녹색은 위험'은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와 동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당시에는 접하기 어려운 메디컬 스릴러의 형식을 완성도 높게 그려낸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대표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군은 영국의 사기를 꺾기 위해 무려 10개월 동안 영국의 주요 도시를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런던 대공습을 감행합니다. 매일같이 폭탄이 쏟아지던 어느 날 공습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마을 외곽의 야전병원 수술대 위에서 마취 중이던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단순 의료사고로 여겼던 환자의 죽음은 또 한 차례 살인이 일어나면서 치밀하게 계획된 연쇄살인으로 밝혀집니다.


사건에 연루된 간호사와 의사 여섯 명이 용의자로 지목되며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야전병원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순박하고 다정한 노인, 매력 넘치는 바람둥이, 성실하고 정직한 청년, 유쾌하고 씩씩한 여자, 단정하고 깔끔한 여자, 아름답고 냉정한 여자 중 한 명은 살인범인 것입니다. 병원에 투입된 커크릴 경감은 독일군의 폭격마저 잊게 할 정도로 치밀한 수사를 펼치며 용의자들을 압박해갑니다.


이처럼 고립된 병원 안에서 여섯 명의 용의자들을 또다시 철저히 고립시켜 그들 스스로 서로를 의심하며 사건의 진위를 캐는 심리전은 작가의 치밀한 설정과 작가적 역량을 인정할 밖에 없도록 합니다. 또한 사건의 해결과 동시에 도덕적으로 완벽하게만 보이는 골든에이지 추리소설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다소 모호한 행동을 일삼는 커크릴 경감은 더욱 현실적이며 입체적인 캐릭터로 부각되어 그 매력을 더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는 프랑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프레드 바르가스의 대표작으로 2009년 영국 추리소설작가협회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바르가스가 창조한 인물 중 큰 사랑을 받는 캐릭터인 아담스베르그 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예고 없이 날아드는 우아하고 섬뜩한 동그라미가 전하는 메시지, 그리고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를 다각적으로 쫓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느 날부터 파리의 거리에는 새벽마다 파란 동그라미가 출몰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맥주 깡통, 바구니 등 평범한 소품들이 들어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고양이와 사람의 시체가 파란 동그라미 안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는 우아한 필체로 "빅토르, 고약한 운명 같으니, 너는 밖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라는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엘리트 수사관 '장 바티스트 아담스베르그'는 관록과 직감을 바탕으로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를 밝히기 위해 수사망을 좁혀갑니다.


"내일 아침 일찍, 오늘 밤에 또 새로운 동그라미가 그려졌는지 반드시 확인하게나. 있다면 열심히 연구하게. 자네만 믿네. 아까 그 여자에게도 조심하라고 말했네. 두고 보게나. 이건 반드시 커질 걸세. 한 달 전부터 동그라미가 갑자기 많아졌네. 가속도가 붙었단 말일세. 여기엔 분명히 아주 끔찍한 뭔가가 있어. 자넨, 그런 냄새 안 나나?"
당글라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글쎄요, 퇴폐적인 뭔가가 있다면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가 대대적으로 벌이는 장난일지도 모르죠……."
"아닐세, 당글라르. 절대로 그렇지 않네. 파란 동그라미에서는 잔인함의 고름이 배어 나온다네."


이처럼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는 프레드 바르가스의 탁월한 서사 전개와 긴장감, 독특하고 정감이 가는 인물들의 등장, 예측하지 못한 반전에 반전을 보여 줍니다. 한여름에 '파란 동그라미의 사나이'를 만나면 입맛 잃기 쉬운 계절에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독서의 즐거움을, 한겨울에 프레드 바르가스의 "롱폴" 시리즈를 만나면 추위를 이겨낼 유쾌한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