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장편소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무서운 밤'을 통해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조망함으로써 우리네 삶의 세목들을 세밀하게 보여 주었던 임영태의 장편 소설, '여기부터 천국 입니다.'는 '인간 복제'라는 미래의 화두를 배경에 두고 수천 년 전 고대로부터의 질문인 절대 가치, 절대 존재성의 문제를 따져 보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자신이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기웅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행적을 제3자의 시선을 통해 비디오카메라에 담듯 담담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원체인 나'와 '복제된 나'라는 실상과 허상의 문제를 통해 인간 세상의 쓸쓸함과 허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회사의 프로그래머인 남기웅은 고급 오피스텔에 살며 안정된 경제력 속에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30대의 미혼 남성입니다. 그에게 어느 날 복제 인간임을 알리는 한 사내가 나타납니다. 사내가 남긴 명함을 단서로 남기웅은 자신을 복제한 연구소를 찾아가게 되고 원체를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극도의 혼란을 보이는 그에게 연구소의 강 박사는 기억이 집을 바꿨을 뿐이라며 돌아가 전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변함없는 일상이건만 남기웅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이라는 사실에 심한 정체성의 혼돈을 겪게 됩니다.


고뇌하는 남기웅에게 강 박사는 원체의 죽음이냐 클론의 죽음이냐는 선택의 기회를 주고 육체의 소멸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기 기억에 담긴 자기만의 날들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에 남기웅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선택합니다. 원체 남기웅의 행적을 모두 정리하고 온전히 자기만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막상 갈 곳도 할 일도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방황하던 남기웅은 결국 경마장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게임 비를 구걸하는 배영찬을 만나 향락과 퇴폐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남기웅은 지금의 낭자한 방탕은 낯선 삶도, 새로운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멈추지 못합니다. 배영찬이 필로폰 값을 대신 갚아 준 남기웅은 심한 배신과 허무 속에 배영찬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정미에게 전화를 걸어 "신이 없으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구절을 인용해 자신이 자유로워졌다는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기억과 살덩어리를 완벽하게 이식받은 복제 인간으로서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살아가야 할 숙명을 부여받은 남기웅의 고뇌를 통해 작가는 허상과 실상은 따로 있지 않으며 그것의 규정은 결국 나 자신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는 내가 가짜일 수 있다. 그러면 나의 인생도, 내가 속한 이 세상도 모두 가짜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게 허상이라는 것을 정작 나 자신만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내가 아는 세상은 나에게는 진짜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게 가짜라는 걸 모르니까" 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어쩌면 세상이 가짜고 남기웅이 진짜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여기서부터 천국 입니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실존적 고뇌를 다룬 소설임에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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