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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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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독자들의 기다리게 만들었던 작가 은희경이 <비밀과 거짓말>(문학동네)이라는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첫 장편 <새의 선물>이 열두 살 난 여자아이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라면 이번 소설은 성인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성장기와 정체성을 반추하는 성장소설 형태를 취했다.

"<새의 선물>과 겹쳐서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때보다는 이야기가 많이 넓어지고 커진 느낌이죠. 그때가 ‘깜찍한 문제제기’였다면 이번은 질문이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처럼 이번 작품은 소설가로서의 10년 활동에 잠시 쉼표를 찍듯, 깊은 사색과 성숙한 문제의식들로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주무대인 시골 소도시 K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공간이다. 거기에 70년대라는, 우리사회가 경험한 가장 파행적이고 폭력적인 역동적 시간을 덧붙였다.                                                                                      소설은 크게 3가지 이야기가 중첩되어 조밀하게 엮여 있다.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루된 집안의 비밀이 한 축이라면, 형제이면서 사사건건 뒤틀리기만 하는 형과 아우의 갈등과 화해가 또 다른 이야기다.

객관적 진실보다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 수 있는 <비밀과 거짓말>은 등단 이후 10년 동안 그녀를 ‘내내 누르고 삭이고 벼려왔던 삶과 죽음의 이야기, 세상과 삶의 무게와 진실, 비밀’에 대한 나름의 고백을 담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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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면서 같은 - 교포 만화가 데릭 커크 킴의 섬세한 성장기록
데릭 커크 킴 지음, 김낙호 옮김 / 길찾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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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시안 아메리칸의 성장 보고서 

『다르면서 같은』은 2003년 말부터 만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교포 만화가 데릭 커크 킴의 작품집이다. 이 작품집은 데릭 커크 킴의 홈페이지(www.lowbright.com)에 2000년부터 3년간 연재된 만화를 모아 출간한 것이다.

2003년 'Ignatz Award' 수상과 'Publishers Weekly' 2003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화제가 끊이지 않았던 이 작품은 이민 1.5세대인 데릭 커크 킴의 가녀린 섬세함과 은은한 감수성이 빚어 놓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작이기도한 「다르면서도 같은」이 보여주는 매력은 미국인과 소수민족,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무거운 구도를 다루면서도 결코 재미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말풍선들은 미국의 전형적인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지만 그 안에 담긴 위트와 군더더기 없는 대사들은 경쾌한 리듬감을 안겨준다.

한국계 미국인인 사이먼과 낸시를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짧은 성찰'을 보여준 그의 또 다른 작품적 특징은 '오리엔탈적'인 냄새가 작품 전반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엔탈 맛이란 게 도대체 뭐지? 동양 전체를 어우르는 맛이 있다는 거야?"
"간단해. 여기 닭고기 맛과 소고기 맛 수프가 있지? 연역법에 의하면 이 속에는 아마 동양인들을 갈아 넣었을 거야."


사이먼과 낸시의 대화처럼 그의 작품 속에는 아메리칸 이면서도 아시안으로 살아가는 작가의 정체성 -아시안 아메리칸, 미국의 한국인 1.5세대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의 기질,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어중간한 정체성- 이 묻어나 있다.

그의 만화가 동양적인 정서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은 만화를 형성하고 있는 크고 작은 선들이 부드러운 곡선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굴의 윤곽, 바다와 구름 등 배경에서 보이는 선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다르면서도 같은」이 보여주는 비밀과 고백 그리고 이해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구도의 맛깔스러움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사이머과 낸시가 털어놓은 각자의 고백으로 시작된 여행에서, 그들은 잊고 있었거나 새로이 발견한 '나'를 찾아낸다. 내적 성숙이란 마음속에 비밀을 바꿔가며 커나가는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하나의 비밀이 소멸되어 그 수명을 다할 때 우리는 조금씩 성장 해나가는 법인가 보다.

이 작품집에는 이민자들의 자화상적 이야기가 담긴 「휘발유」, 2000년부터 약 2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며 그린 「똥침」, 9·11 다음날 그렸다는 폭력의 단순성을 파해친 「인간과의 인터뷰」등 총 열세 편의 명료하고 힘있는 주제의식을 지닌 단편들이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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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번째 사내 문학동네 시집 40
이영주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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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008번째 사내>     이영주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분으로 등단한 이영주의 첫 시집 <108번째 사내>는 괴기하면서도 슬픈 이미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녀의 시 세계는 언어를 구축했다가도 이내 해체 시켜버리는 잔인함과 그 잔인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아픔의 체온이 공존한다.    


“내 입 속에서 터질 듯 웅얼거리는/ 말의 망령들이 떠도는 이 지하방”에서 작가는 마른기침과도 같은 시어들을 토해내며 세상의 부조리를 성토한다.


그녀에게 “지하도 안, 신이 되지 못한 노인들이 신문지를 덮고 기도를 하는” 현실이나 “골목의 소녀들이 귀가하는 아버지의 몸에 타액을 뱉는“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은 모두 현실이 낳은 ”거리의 사생아“들 이다. 

작가의 시안은 “한낮에 담쟁이넝쿨을 잘라내는 늙은 여자”“밤이면 등에 돋은 종양”에 괴로워하는 고달픈 세상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시어보다는 음울한 시어들이 주를 이룬다.


어쩌면 그녀는 이 부조리한 사회를 108번째의 사내에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거쳐 간 사내들의 꼬리는 모두 녹아버렸어요 그들은 모두 집을 잃고 이 방으로 숨어들어요 모두 이곳에 번뇌를 두고 사라져요”

여자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뜻하지 않은 번뇌뿐이다. 불행이 자신의 의지로 제어 할 수 없듯 부조리하게 발기된 세상에서 여자의 슬픔은 날카로운 시어들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인이 조심히 긋는 번뇌와의 단절은 더 이상 아름다운 시어가 없을 듯한 현실과의 이별을 의미하기보다는 새로운 생을 찾아 나서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여인이 강가에 앉아 탯줄을 태우고 있습니다/ 아이의 목을 휘감았던 탯줄을 잘라내고/ 하얗게 질린 아이의 영혼을 먼 땅으로 보내기위해/ 여인은 바구니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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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 보부아르
클로딘 몽테유 지음, 서정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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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출현 이래 즉, 아담과 이브가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남성과 여성은 공존해 왔다. 하지만 20세기가 넘어서도록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21세기인 지금도 여성은 창조 중이다.

『보부아르 보부아르』에는 두 명의 보부아르가 나온다. 첫 번째 보부아르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의 문제, 여성의 시각에서 작품을 만들었던 작가였다. 사르트르의 영혼적 연인으로도 유명했던 그녀는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으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이 가져다준 '공쿠르상'의 영예는 대단했지만, 여성의 억압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작품은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이제 나는 당신네 여주인의 질의 모든 것까지 잘 알게 되었소.”라는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비난은 당시 언론과 사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여성을 잘 묶어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2의 성』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후에 '제2의 성의 딸들'로 불려지는 페미니스트들의 유대감을 밀착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을 줬다.

두 번째 보부아르인 '엘렌 드 보부아르' 역시, 비록 언니 '시몬 드 보부아르'와는 다른 형태인 안정된 제도 속에서 살아왔지만, 여성의 위대함이 단지 남성이라는 그늘에 묻혀버리는 현실을 안타깝게 느끼고 있었다. 노년의 작품인 '여자는 고통받고 남자는 심판한다', '마녀 사냥은 언제나 열려있다'등 제목에서만 보더라도 페미니스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실참여적인 작품은 그녀가 남성 위주의 예술적 시각에 대해 얼마나 넌덜머리를 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언니인 시몬의 작품 속에서 조차 여성 예술가들은 정중한 대접을 받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엘렌은 안타까워했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금기를 중요시하던 엄마보다는 언니 시몬을 의지했던 탓에 엘렌은 시몬의 모든 점을 이해하려고 했다.

1940년 후반에 프랑스에서 발표된 실존주의 사상이 짙은 작품들은 사회와 생존의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바탕 위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추구하려는 공통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실존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살아있는, 혹은 살아가는 여성을 표현하기 위해 보부아르 자매는 각각의 재능으로 작품에 몰두했다.

비록 명성의 차이는 있었지만 두 여인은 여인들의 미래를 설계했다. 남성우월사회에 끊임없이 '여성'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내놓았던 시몬이나 사르트르의 제자이기도한 남편 리오넬과의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며 800점의 유화를 남겼던 엘렌이나, 그녀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순종과 여성적 나약성을 깨뜨리기 위해 몸부림 쳤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엘렌 드 보부아르는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당시의 사회가 요구했던 '정숙한, 체념적인 여인들의 생'과는 다른 열렬한 생을 원했었다. 엘렌의 말처럼 그녀들은 '삶'과 '창조'를 원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클로딘 몽테유는 1970년대에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중 시몬을 만났다. 그리고 '제2의 성의 딸'로써 두 자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유엔에 의해 '여성의 해'로 선포된 1975년 이래 지지자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낙태, 강간, 근치상간, 매 맞는 여성 등 금기로 여겨지던 주제들에 대한 침묵의 법칙을 깨뜨림으로써 우리는 사회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조건은 후퇴'하고 있다고 그녀들은 믿었다. 칼라스처럼 '행복할 수 있는 많은 자질을 갖추었던 여성이 불행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도 여성은 창조 중이며 아직까지도 완벽한 탄생을 하지 못했다. 1986년 시몬이 숨지던 날 몽테유는 눈물 속에서 기사를 썼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하나의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산다는 것이었다."

문인과 화가로서 두 자매가 보여준 삶과 창조에 대한 열망과 투쟁은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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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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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 ‘매매’라는 상업적 교류는 음탕하고 더러운 오물이 버려지는 시장 뒷골목에서도 성행되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복잡한 행렬들 속에 섞여 창녀와 그녀를 쫒는 남자들의 발길이 시장 뒷골목으로 사라져도 활기 찬 대낮의 소음들은 그들의 행적을 덮어주었다. 또한 밤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빛들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분산시키기에 아주 알맞은 속도로 깜박거리며 남성의 욕망을 끌어당겼다.

창녀라는 유서 깊은 직업이 돈과 남성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삼천 년경 수메르의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금전의 보수를 받지 않는 ‘성적 구호의 목적’을 가진 접대 매춘부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주로 여행자를 상대로 자선적으로 행해졌던 이 풍속은 나중에 신성화되어 제사 의식의 형식을 취하는 신전 매춘이 되었다. 이 배후에는 성의 주술적, 신비적인 힘, 즉 생식력으로써의 기능을 신앙과 결부한 사유가 있었다.

헤로도토스의 기술에 의하면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스로 딸을 신전의 창녀로 제공하여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정황에도 ‘여성’ 스스로가 성의 주체가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창녀라는 직업은 개인적인 사유나 아무리 거국적인 사명을 띠더라도 '남성’이라는 주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직업이 세분화되고 성의 노출이 평등을 향하게 됨으로써 몸을 파는 직업인의 의식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매춘의 행위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돈’이라는 권력에 따라 남성들 역시 자신의 성을 상품화하게 됐으며, 여성들 역시 생존과 더불어 자신의 미(주체)를 발산하기 위해 성을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세상 남자들의 구미를 보다 확실히 끌어 모으기 위해, 창녀 노릇 제대로 한번 해보기 위해, 대학 공부까지 한다’는 푸른 눈동자에 눈부신 금발의 넬리 아르캉의 고백이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래 난 내가 하는 얘기 속에서 아름답길 원해. 단숨에 내 생각 속의 열정을 모조리 드러내고 싶다고, 심술궂고 덩치 큰 늑대가 빨간 모자를 찾아다니는데 정작 빨간 모자는 자기를 쫓는 늑대 어디 없나 아쉬워하는 꼴이지, 나한테는 권리가 없는 뭔가가 내게 주어진 걸까, 아니면 미치도록 갈망하는 뭔가에 대한 권리가 내게 없었던 걸까.”

그녀의 말처럼 ‘성’의 주체는 여전히 늑대들이 움켜쥐고 있다. 그녀들의 촉촉한 젖가슴과 미끈한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의 눈빛은 여전히 성의 권리를 나뉘어 갖길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성을 창출하는 창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든지 값을 지불하는 자에게 나 자신을 줘버리는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여자로 만드는 것에 전념하지. 바로 내 명성의 핵심인 이 여자다움에 말이야 (…) 하지만 그건 여자다움만으로는 고객의 변덕을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 그냥 나를 집어삼켜버리는 무한정의 순응성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지. 그래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다움이란 끝이 없으면서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돼야 고갈되고 마는 순응성이라고.”

여성의 최대 무기는 남성을 무력화 시키는데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 자신에게 ‘순응하는 여성’이라면 여자는 그런 남자의 피상적인 생각에 순응하는 척하며 남자의 오만한 성기를 무력화 시키면 되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가 권력의 의미를 갖는다면 늘어진 성기는 이미 모든 권력을 잃은 노인의 한숨과도 같을 것이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영원히 잠들게 하는 것은 오직 여성만이 갖고 있는 ‘재창조’의 특권뿐이다.

“삶에 대해 무언가를 알기 위해선 그것을 재창조해야만 하지.”

잘못 발전된 성이라는 개념을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여자라는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오년 간 매춘에 종사했던 아르캉의 성에 대한 고백은 끊임없이 주절대는 자유연상과 비관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다. 종교관으로 무장한 아버지와 건조해진 아버지의 뒤꿈치만을 바라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의 해체가 빈번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꼬고 있다. 또한 이 땅의 아버지가 모두 그녀의 고객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여자들 또한 이미 창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내 인생에 단 한 남자라는 건 위험한 발상이야. 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내 안의 증오가 너무 커, 내게는 행성 전체, 전 인류가 필요해. 게다가 내가 한 남자에게 무얼 줄 수 있어, 아무것도 없지.”

그녀의 증오는 남자라는 종(種)을 넘어서, 애정이 상실된 이 땅의 모든 연인들에게 뿌려지는 독설이다. 애정 없이 오로지 살붙이라는 명목에만 매달리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부실하게 지어놓은 건축 구조인지, 또한 사랑 없는 행해지는 부부행위가 매춘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아르캉은 그녀만의 독설적인 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애정 없이도 해치울 수 있는 부부관계보다는 ‘노력을 요하는’ 매춘은 그 대가로 일정한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노동의 산물’이라서 더욱 값진 일일수도 있다. 또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도전해보는 것도 그녀다운 발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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