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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
넬리 아르캉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 ‘매매’라는 상업적 교류는 음탕하고 더러운 오물이 버려지는 시장 뒷골목에서도 성행되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복잡한 행렬들 속에 섞여 창녀와 그녀를 쫒는 남자들의 발길이 시장 뒷골목으로 사라져도 활기 찬 대낮의 소음들은 그들의 행적을 덮어주었다. 또한 밤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빛들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분산시키기에 아주 알맞은 속도로 깜박거리며 남성의 욕망을 끌어당겼다.
창녀라는 유서 깊은 직업이 돈과 남성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삼천 년경 수메르의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금전의 보수를 받지 않는 ‘성적 구호의 목적’을 가진 접대 매춘부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주로 여행자를 상대로 자선적으로 행해졌던 이 풍속은 나중에 신성화되어 제사 의식의 형식을 취하는 신전 매춘이 되었다. 이 배후에는 성의 주술적, 신비적인 힘, 즉 생식력으로써의 기능을 신앙과 결부한 사유가 있었다.
헤로도토스의 기술에 의하면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스로 딸을 신전의 창녀로 제공하여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정황에도 ‘여성’ 스스로가 성의 주체가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창녀라는 직업은 개인적인 사유나 아무리 거국적인 사명을 띠더라도 '남성’이라는 주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직업이 세분화되고 성의 노출이 평등을 향하게 됨으로써 몸을 파는 직업인의 의식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매춘의 행위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돈’이라는 권력에 따라 남성들 역시 자신의 성을 상품화하게 됐으며, 여성들 역시 생존과 더불어 자신의 미(주체)를 발산하기 위해 성을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세상 남자들의 구미를 보다 확실히 끌어 모으기 위해, 창녀 노릇 제대로 한번 해보기 위해, 대학 공부까지 한다’는 푸른 눈동자에 눈부신 금발의 넬리 아르캉의 고백이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래 난 내가 하는 얘기 속에서 아름답길 원해. 단숨에 내 생각 속의 열정을 모조리 드러내고 싶다고, 심술궂고 덩치 큰 늑대가 빨간 모자를 찾아다니는데 정작 빨간 모자는 자기를 쫓는 늑대 어디 없나 아쉬워하는 꼴이지, 나한테는 권리가 없는 뭔가가 내게 주어진 걸까, 아니면 미치도록 갈망하는 뭔가에 대한 권리가 내게 없었던 걸까.”
그녀의 말처럼 ‘성’의 주체는 여전히 늑대들이 움켜쥐고 있다. 그녀들의 촉촉한 젖가슴과 미끈한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의 눈빛은 여전히 성의 권리를 나뉘어 갖길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성을 창출하는 창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든지 값을 지불하는 자에게 나 자신을 줘버리는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여자로 만드는 것에 전념하지. 바로 내 명성의 핵심인 이 여자다움에 말이야 (…) 하지만 그건 여자다움만으로는 고객의 변덕을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 그냥 나를 집어삼켜버리는 무한정의 순응성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지. 그래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다움이란 끝이 없으면서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돼야 고갈되고 마는 순응성이라고.”
여성의 최대 무기는 남성을 무력화 시키는데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 자신에게 ‘순응하는 여성’이라면 여자는 그런 남자의 피상적인 생각에 순응하는 척하며 남자의 오만한 성기를 무력화 시키면 되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가 권력의 의미를 갖는다면 늘어진 성기는 이미 모든 권력을 잃은 노인의 한숨과도 같을 것이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거나 영원히 잠들게 하는 것은 오직 여성만이 갖고 있는 ‘재창조’의 특권뿐이다.
“삶에 대해 무언가를 알기 위해선 그것을 재창조해야만 하지.”
잘못 발전된 성이라는 개념을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여자라는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오년 간 매춘에 종사했던 아르캉의 성에 대한 고백은 끊임없이 주절대는 자유연상과 비관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다. 종교관으로 무장한 아버지와 건조해진 아버지의 뒤꿈치만을 바라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의 해체가 빈번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꼬고 있다. 또한 이 땅의 아버지가 모두 그녀의 고객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여자들 또한 이미 창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내 인생에 단 한 남자라는 건 위험한 발상이야. 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내 안의 증오가 너무 커, 내게는 행성 전체, 전 인류가 필요해. 게다가 내가 한 남자에게 무얼 줄 수 있어, 아무것도 없지.”
그녀의 증오는 남자라는 종(種)을 넘어서, 애정이 상실된 이 땅의 모든 연인들에게 뿌려지는 독설이다. 애정 없이 오로지 살붙이라는 명목에만 매달리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부실하게 지어놓은 건축 구조인지, 또한 사랑 없는 행해지는 부부행위가 매춘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아르캉은 그녀만의 독설적인 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관점에서 본다면, 애정 없이도 해치울 수 있는 부부관계보다는 ‘노력을 요하는’ 매춘은 그 대가로 일정한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노동의 산물’이라서 더욱 값진 일일수도 있다. 또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도전해보는 것도 그녀다운 발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