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말에 발의된 이 법안의 제안 사유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제안이유

21세기 지식정보사회 발전의 기반인 다양한 도서의 생산과 시장질서는 국민에게 양질의 도서가 보다 저렴하고 원활히 공급되도록 하는 보루이며, 독서문화 창달과 출판산업진흥을 위해서는 간행물 유통에 저해요인이 되고 있는 규정과 불합리한 예외조항을 개정하여 건전한 유통환경을 활성화시킴으로서 출판관련 산업을 육성하고자 함.

2003년 2월 27일부터 시행된 「출판 및 인쇄진흥법」은 당초 입법 취지와는 상반되게 전자상거래 촉진과 시장경쟁 논리에 우선순위를 두고 기형적으로 제정되어 오프라인 서점과 온라인 서점간에 편향적으로 할인을 허용함으로써 형평성 문제가 대두되어 유통질서의 혼란이 극심한 실정임. 또한 연차적으로 정가제 범위를 축소하여 2007년까지 완전 폐지한다는 내용으로 시행중임. 따라서 현행 도서정가제의 시급한 개정을 통해 글로벌 지식경쟁 시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출판진흥법이 되도록 하여야 함.

- 이 말을 정리해보면...
지식정보사회 발전의 기반이 다양한 도서의 생산과 시장질서에 있다는 말이다.
지식정보사회 발전에 다양한 도서 생산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장질서란 말은 왜 들어간 걸까? 출판 관련 종사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출판 및 인쇄 진흥법"이 어느 경우에도 실제로 진흥에 이바지하고 했던 적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 법안의 핵심 요소는 "시장 질서와 유통 질서"를 뜯어 고치자는데 있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 법안의 핵심은 "시장과 유통"이란 말이다.
다음은 개정안의 핵심적인 부분들이다.


제2조에 제12호를 다음과 같이 신설한다.
12. “정가판매”라 함은 사업자가 현금할인 및 사은품, 누적점수제, 할인쿠폰 등의 유사한 형태의 할인이 없이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제22조제2항을 다음과 같이 한다.
②간행물을 판매하는 자는 이를 정가대로 판매하여야 한다. 잡지의 경우에도 또한 같다.
제22조제3항제1호를 다음과 같이 하고, 동항제2호 중 “도서관, 사회복지시설”을 “사회복지시설”로 한다.
1. 기간이 경과(과월 등)한 잡지
제28조제1항제5호 중 “정가 또는 정가의 1할을 초과하여 할인판매를 한 자”를 “할인 판매를 한 자”로 한다.
법률 제6721호 「출판 및 인쇄진흥법」 부칙 제2조를 삭제한다.


- 이 법안을 어째서 "출판 및 인쇄진흥법"이란 명칭보다는 "도서정가제"법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하 "도서정가제법").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온라인 서점들이나, 오프라인 서점들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그 중 어떤 입장의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은 쥐꼬리만큼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공평무사한 사람이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철저하게 내 편이고, 소비자로서 당연히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책을 구입할 거고, 이 법안이 나의 이득, 이해관계에 반한다면 당연히 반대한다. 게다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상관없이 내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을 가차없이 공격할 거다.

우선, "도서정가제법"을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을 보면...
책이 상품이란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장질서를 교란시키는 거다. 자본주의에서 칼 맑스가 "노동의 소외"를 주장한 이래 어떤 상품도(심지어 인간조차) 상품이 아닌 것이 없거늘, 책만 유독 문화라고 규정하고 나서는 이유가 뭔가? 그렇게 해서 당신들이 얻는 이득이 뭔가? 그건 이 법안의 엉터리 같은 취지를 호도하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다.

누가뭐래도 책은 상품이다. 그것도 문화상품이다. 문화니까 상품이 아닌가? 천만에 말씀이다. 모든 문화는 상품이고, 예술가들도 작품이란 이름으로 상품을 창조해 이를 공급하여 먹고 산다. 시인도 이슬먹고 살지 않고 밥 먹고 산다. 그런데 책은 상품이 아니라 문화재이니까, 도서정가제를 통해 이의 유통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나온걸까? 그것은 자신들, 정치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 나서서 문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전자제품의 예를 들어보자, 백화점에서 팔리는 TV와 대리점에서 팔리는 TV, 할인점에서 팔리는 TV,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장소에서 TV가 팔린다. 동일한 제품이지만 구매 장소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용산에서 사면 더 싸지만, 구태여 용산에 가는 수고로움을 원치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같은 소매점이니까 백화점도, 할인점도, 대리점도, 용산에서도 똑같은 가격을 받고 팔라는 것이 이 법안이 주장하는 시장질서고, 유통질서다.

요새 유행하는 개콘식 표현을 빌자면 한 마디로 이렇다.

"지금 장난하냐? 장난해."

우리가 출판 세계 6대 강국이고, IT 몇 대 강국이니 어쩌구 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재래시장과 대형 유통할인점간의 경쟁에서 심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는 재래시장의 편이다. 같은 맥락에서도 나는 각 지역마다 존재하는 영세서점들의 붕괴가 마음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대로 가격을 매겨 판매한다고 이런 조류가 바뀌리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상도 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에 정부나 정치가 관여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규제고, 다른 하나는 지원이다. 지금 이 법은 물론 장려를 빌미로 한 규제책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거다. 문화에 대한 오랜 교훈이 있다. "정부는 지원만할 뿐 참견하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정부와 정치가 참견하고 나서서 문화가 잘 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지난 박통, 전통 때 이미 세계 최고의 문화국가가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책을 문화상품으로 인정해준다면, 그리고 책과 출판에 대해 정부와 정치의 영역에서 진정으로 지원해주고 싶다면... 도서정가제는 결코 적당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왜냐? 출판사는 영화사와 달라서 제 아무리 규모가 크다 하더라도(물론 일부 아동서적, 교육지 전문 회사들은 크다) 영화사처럼 대규모 자본을 동원할 능력이 없으므로 자체적으로 유통망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대개의 출판사는 영업대행을 둔다. 그들이 오프라인 서적 도매상들이다. 이들은 대개의 출판사에서 도서 정가의 60-70% 혹은 아주 좋게 쳐주면 80%정도의 가격으로 책을 받아온다. 그리고 소매상에 판다. 소매상은 10-20%의 마진율을 보고 책을 가져온다. 소비자는 정가를 다 주고 사거나 쿠폰이나, 단골이란 이유, 기타등등으로 10%정도의 할인율로 책을 구입한다. 그런 까닭에 출판사가 온라인 서점에 책을 팔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도서정가제법이 온라인 서점의 이익에 큰 위해가 되진 않을 거다.

이 법이 생긴다고 해서 없어졌던 동네 영세 서점들이 다시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고, 설령 생겨난다고 해도 대형화되지 못한 이들 서점을 찾았다가 며칠씩 기다리고, 다시 찾아가도 책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므로 집이나 회사까지 택배로 배달해주는 온라인 서점의 편리함은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업이익에 지장을 받는다면 택배비를 주문자에게 부담시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DVD나CD구입 전문 온라인 쇼핑몰이 그러하듯 나는 택배비를 부담해서라도 구입할 수밖에 없다. 내 월급을 시급으로 쪼개보면 내가 택배비 아끼자고 직접 나가서 구입할 시간에 다른 일 하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게다가 교통비 들고, 나가면 음료수라도 하나 사먹어야 하고, 없으면 다시 가야 하지 않나.)

도서정가제법이 정말 책과 출판을 진흥하는 법이라면 출판사 대표들이 찾아가서 절이라도 했을 거다. 이건 별로 대안이 못된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진짜 대안이 뭐냐?

- 대안
선진국에서도 오래전부터 문화상품을 진흥시키기 위해 여러 경로로 지원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생산자를 지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작집단에게 장기저리로 지원하거나 이들에게 공간을 염가에 임대해주거나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창작지원금 제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의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하는 일을 몇몇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방식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과 실제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이후 선진국에서 문화상품을 진흥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이 생산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의 지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창작자들이 좀 더 쉽게 많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부는 좀더 많은 예술공간을 만들고, 이들에게 싼 값에 임대하여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제작비를 지원해서 이들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일반 대중이 비싼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공연의 전시장 임대, 제작비 지원 등을 통해 공연 관람료가 실제 공연 관람료보다 저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실질적으로 관람료의 일부를 정부가 세금으로 부담해주는 형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책과 출판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좀더 다양한 도서를 만들어 지식정보사회에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육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부는 이런 점을 고민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선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도서관 숫자를 전국적으로 10배 이상의 숫자로 확충하고, 도서관 규모와 도서 구입비, 전문 사서 고용 등의 예산도 그와 같은 규모로 확충해야 한다. 이것을 한 두 해에 걸쳐 하는 것이 아니라 매 10년 동안 이런 형태로 늘여 나가야 한다.

전국의 도서관 숫자가 2,500곳이라면 출판사가 1쇄로 찍어내는 책 부수 자체가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거기에 전문 사서가 고용되어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해서 주문한다면 양서와 그렇지 않은 책도 저절로 갈리게 될 것이다. 학술 서적 초판이 아이들 동인지도 아닌데 300부 나오는 현실은 도서정가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문제점의 해결은 우선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책을 돈 주고 사보는 버릇을 길러야 하고, 둘째. 대학이 도서관에 좀더 대대적인 투자를 해야 하고, 이를 지역민에게도 개방해야 하고, 동시에 지역에 쓸만한 도서관을 다수 확보해야 가능하다.

제발 공공도서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우리 집 안방이 대신하도록 방치하지 말아주길...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잡지를 육성해야 한다. 물론 내가 잡지를 만들긴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현재 내 월급은 독자들이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잡지를 지원해주고 있는 문화재단이 대신 내준다. 시민단체들 가운데 몇몇 단체들은 시민들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연말이면 세금 정산을 해준다. 기부하면 세금 감면 헤택이 있는 거다. 그러니 시민들로 하여금 마음에 드는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정기구독한 영수증을 주면 연말 정산에서 시민단체들처럼 세금 감면이 가능하도록 지원해주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잡지 정기구독자가 늘어날 거고, 광고도 따라올 테고, 원고료도 늘어날 테고, 원고료가 늘어나면 우리 사회 전반의 지식실업자들, 문화예술 실업자들도 저절로 구제될 거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지오"나 "키노" 같은 월간지가 존속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지오는 사진잡지고, 키노는 영화잡지인데... 이들 잡지가 월마다 나오고, 각 잡지마자 필자가 각 40명씩 붙는다고 치더라도 두 잡지 합치면 80명이다. 이들 잡지가 폐간되지 않고 존속했다면 우리는 매월 40명의 문화실업자, 지식실업자, 백수들에게 매월 어느 정도의 글값을 지불해 이들이 계속 다른 생계(교수에 목을 매지 않아도)를 찾지 않더라도 비평활동이나 창작활동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아무런 지원도 없었다. 그런 판국에 이명박 서울 시장은 4조원을 들여 오페라하우스를 짓는단다. 4조원을 들여 오페라 하우스를 지으면 과연 1년에 몇 명이나 이 오페라를 보러 갈 것이며, 오페라 보러 가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래도 누구 하나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도 국민 세금으로 짓는 거다. 내가 세금 내고 난 보러 가지도 못할 극장 건립에 4조원씩 처바르는 게 과연 합리적인 일인가.

게다가 오페라는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서양 애들을 능가할 수 없는 장르이며,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이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제외하고 아시아권에 전문 오페라 하우스는 하나도 없고, 별로 필요도 없다. 그건 예술의 전당 오페라 전용극장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제발 못 가지고, 못 배운 놈들처럼 덕지덕지한 문화콤플렉스 좀 벗어버리자. 오페라 하우스 지을 돈으로 도서관을 지어주든, 아니면 대중음악 전용 극장을 지어주는 게 훨씬 더 세금을 잘 써버리는 방법이다. 대선 나갈 때 치적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말이다.

"도서정가제법" 주장하는 정치인들... 그들은 아마 이 법안 내놓고 스스로 자탄했을지도 모른다. "아, 난 왜 이렇게 문화적인 인간인 거지..."하고 말이다. 좋다. 도서정가제 법안 지지해주께. 대신에 전국에 도서관 좀 지어주라. 24시간 풀가동하고, 내가 찾는 책들은 웬만하면 다 있는 그런 도서관 좀 우리 집 옆에 지어주고, 잡지 정기 구독하면 연말 정산에서 세금 감면 좀 해주라. 그러면 나도 니네들 그 법안 지지지해줄께.

그렇게 못해줄 거면... 나 책 사는 거 방해나 하지 마라! 문화란 어쩌다 한 번 턱시도 차려 입고 오페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실천을 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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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4-2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바람구두님, 이렇게 옳은 소리만 골라 하십니까? 도서관 숫자 확 늘리고, 대학 도서관을 일반에게도 공개하고, 교수들도 제발 좀 책 사서 보고, 전문사서 고용해서 반드시 비치해야 할 책들을 선별해서 구입한다면 도서정가제 안 해도 우리나라 출판 현실이 진일보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릴케 현상 2005-04-22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4시간 운영하는 도서관! 그런 거 있으면 좋겠다.

안녕, 토토 2005-04-23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한테 아무도 뭐라고하지않는건 뭐라고하거나 말거나 지 하고싶은대로 한다는걸 너무 많이 봐버려서 그런거죠. 서울시하면서도 그렇게 말아먹는데 대통령하면 아마 청와대앞에도 뭔가 큰 공가 하지 않을까싶어요.

바람구두 2005-04-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클리오 2005-04-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책사는거 방해하지 마라.. 에 절대 동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