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투쟁'하자는 '486 뉴라이트'

‘권력 486’을 지향하는 분들이 '80년대'의 사상투쟁을 다시 벌이자고?

  
이종태(월간 말지 편집장)
  
요즘 자칭 '자유주의 486 뉴라이트'라는 분들이 설치고 있다. 청와대나 의회에 진출한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을 '좌파' 혹은 '권력 386'이라고 부르며 '과거'를 고백하란다. '권력 386'이야말로 현 정치경제적 혼란의 주범이며, 일찌감치 '전향'한 자기네 '뉴라이트'야말로 '권력 386'을 제일 잘 아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 양반들, '권력 486'이 되고 싶은가 보다. '내부 고발자'로서 말이다. 정말 무섭다.

사실은 이런 행동 스타일 자체가 과거 80년대 운동권 세대들의 가장 못된 고질병이다. 박정희, 전두환 집권 당시 중ㆍ고등학교를 다닌 이 세대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상의 '사'자도 알지 못하게 억압당했다. 이에 대한 반동인지 대학에 들어가자 말자 너무나 쉽게 사회주의자가 되고, 주체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과격해 보이는 사상을 골라 상표처럼 걸치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이 시대에 흔한 일이었다. 이는 다른 사람(다른 정파)의 '사상'을 문제삼으며 자신(자기 정파)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당신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보수야당과 연대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기실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므로' '나야말로 사회주의 정통 레프트'라는 식이었다. 당시의 '좌파 패거리'들은 이렇게 다른 패거리들을 '기회주의자'로 몰고 '기회주의 사상 때문에 운동이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성되었다. 필자는 뉴라이트라는 분들이 이 못된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원인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기 보다 '사상이 문제'라는 구태의연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게 궁금하다. 저 뉴라이트들은 이른바 '권력 386'들, 그리고 정치권 뿐 아니라 각계의 중추적 위치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386들이 그들의 '좌파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있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 필자는 이른바 386들이 현재 좌파이기는커녕 과거에도 좌파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80년대가 좌파가 되기엔 너무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2~3회에 이르는 교내시위나 거리시위, 조직활동 등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데도 너무 바빠서 20여 년 후까지 고이 간직할 좌파 사상 따위는 제대로 학습하지도 못했다. 또 술은 얼마나 먹어댔던가.

물론 속성으로 번역된 소련의 맑스레닌주의 교과서들이 유행하고, 어떤 이들은 북한 방송을 녹취해서 읽어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두 계급 밖에 없다'는 레닌의 '명언'을 외우고 다닌다고 해서 볼셰비키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필자는 80년대의 학생운동이 사상적으로 그토록 과격했던 이유를 '광주학살의 과격성'과 '민중생활의 파탄'이라는 '당대의 현실'에서 찾는다. 전두환 정권은 지금 비판언론으로 자처하는 얼굴 두꺼운 무리들 이외의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정권이었다. 당시 민중생활도 70년대 말 중공업 부문의 과잉생산 여파로 80년대 중반 이후까지는 상당히 비참한 상황이었다. 저항할만한 근거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다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수반하는 행위였고 이는 사회 일반에서 자신을 '격리'하는 심리적 기제를 필요로 했다. 그 기제가 좌파 사상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좌파 사상의 내용보다는 '좌파 사상을 학습하는 행위' 그 자체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전두환 치하에서 좌파사상 학습은 '범죄'였기 때문이다.

약간 농담을 섞어 이야기하자면 당시 운동권이 된다는 것은 수호지에서 송나라 관리였던 임충이 양산박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양산박 두목들이 한패가 되려는 임충에게 내건 조건은 범죄를 저질러 아웃사이더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80년대에 운동권이 되려면 좌파사상을 학습한다는 '범죄'를 저질러야 했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주장이 현실 속에서 충분히 검증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학생시절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한 운동권 출신의 의원은 이라크파병을 지지했다가 학교 후배들에게 사무실을 점거 당하는 봉변을 당했다. 열린우리당에서 민중생활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 자유무역협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의원은 386 가운데 실세 중 실세라는 인사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좌파니 우파니 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뉴라이트 여러분, 진심으로 '권력 486'을 지향한다면 그 '사상 어쩌고' 하는 버릇부터 버리기 바란다. 지금 와서 80년대의 사상투쟁을 다시 벌이자고? 어쩌면 이토록 오랫동안 80년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수가 있는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지금 당신들을 추켜세운다고 지나치게 들뜰 필요도 없다. 그 신문들, 우습게 보여도 제법 약삭빠른 현실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사상밖에 모르는 당신들을 오래 좋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열독한 바 있는, 소련 철학교과서 번역판의 속표지에 인쇄되어 있었던 괴테의 경구를 상기시켜 드리고 싶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출처 : 말지 12월호 데스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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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2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말인데,, 괴테가 먼저 했군요...^^


사마천 2004-11-2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텔레스가 던지는 말이죠. 이걸 헤겔,맑스가 차례대로 인용합니다. 파우스트는 언제든 읽어보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많은 문제를 던지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