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읽기 외전(外傳) - 올해 읽은 것들....


올해 내가 무슨 목표를 세웠더라....
오늘 10월 1일이니까. 국군의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올해 남은 3개월의 시작이다. 얼마전부터 10월 1일이면 올해 내가 세웠던 계획들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기로 했었다. 사람들은 이루지도 못할 커다란 계획에 치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매일매일 작은 계획들을 꾸민다. 친구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기 보다는 작지만 자주 선물을 주는 것이 내겐 더 기뻤다. 예전에 처음 연애란 것을 할 때 나는 주머니마다 이런저런 선물들을 가득 채워 그녀 앞에서 잊을 만하면 하나씩 선물을 꺼내 하루 종일 준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연애에도 가끔 감동이란 게 필요하다는 걸 나같이 약삭빠른 인간들은 잘 안다.

처음 만나자마자 예쁘게 포장한 선물 하나를 준다. 그리고 같이 차 마시러 가서 주문하는 동안 호주머니에서 작은 선물 하나를 꺼낸다.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하나는 잊고 있었네'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주문한 차가 배달되어져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지는 동안 다시 주머니에서 선물 하나를 꺼낸다. 그녀를 만나고 있는 몇 시간 동안 한 시간에 하나 꼴, 30분에 하나 꼴로 나는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이 꼭 비쌀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포장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포장을 뜯는 동안 선물을 주고받는 가장 기쁜 순간이니까. 예를 들어 나는 작은 상자에 알록달록한 예쁜 캔디들을 하나 가득 담은 것, 어린 시절 공기놀이 할 때 쓰던 작은 공기돌로 쓸만한 조약돌을 반지 케이스에 담아 준 적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하루종일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하루종일 그녀를 기쁘게 해줄 마음에 부풀어 하루종일 그녀를 위한 선물을 사러 쏘다녔고, 그렇게 구한 선물들을 온갖 치장으로 예쁘게 포장했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들은 아무리 크든 작든 모두 내가 사준 것으로 채우고 싶었다. 머리를 고정시킬 때 쓰는 작은 실핀부터 아침에 일어나 엉킨 머리를 풀 때 쓰는 브러쉬 빗에 이르는 사소한 것들에게서 날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꾸만 무엇인가 주고 싶어지게 된다. 나의 사랑을 주고, 나의 마음을 주고, 나의 관심을 주고, 나의 시간을 주고, 나의 생각을 주고, 나의 모든 걸 주고 싶어지게 된다. 그러다 그 사랑이 떠나버리면 나는 내가 준 것만큼 고통스럽고, 그 고통만큼 아프다.

그렇게 7년을 사랑한 내 첫사랑이 떠나버렸을 때....
그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저런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그 버릇만큼은 남아서 나는 아주 작은 계획들을 세운다. 오늘 하루는 어떤 일들을 저지를 것인지 세세하게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으며 하루의 계획들을 세운다. 가령, 오늘은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이란 책의 리뷰를 올려야지 생각한다든지, 오늘 집에 갈 때는 사무실에 펼쳐두었던 어떤 책들을 챙겨서 집에 갈 것인지 같은 세세하고 작은 계획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면 수첩에 그것들을 깨알같이 적어둔다.

이렇게 하루 일과는 빼곡하게 계획하고 기록하지만 대신 나는 1년의 계획이나 상반기, 하반기 계획 같은 것은 짜지 않거나 지극히 방만한 것들로 계획한다. 오늘 내 계획 중 하나는 전에 선물받았던 다즐링 홍차 한 잔을 우려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은 까먹지만 않는다면 확실히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1년의 계획이란 1년간 일관되게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다. 인생을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겐 1년의 계획이란 것도 벅차기 그지 없다. 예를 들어 올해 나는 다음과 같은 독서 계획을 세웠었다. 올해는 시집을 중심으로 책을 읽기로 했었다. 지난 몇년간 홈피랍시고 만든 뒤에 사회과학 서적이나 인문서적 중심으로 책을 읽다보니 시집을 손에서 놓은지 근 5-6년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계획은 집에 가지고 있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200여권을 다시 읽는 것으로 했었는데, 읽다보니 지겨워졌다. 계획이란 꼭 그렇게 되라고 만든 것이긴 하지만, 계획에 휘둘려서는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전쟁에 나간 장군이 모든 작전을 계획대로만 수행한다면 천변만화하는 전쟁의 수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임기응변이란 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계획했던 문학과지성 시인선 다시 읽기는 1/4분기 즉, 1월에서 3월달에 이르는 동안 30권 정도를 읽고 정리하는 중에 스스로 지겨워져 나가 떨어지면서 끝장나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5월달에는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면서 그간 정리해논 노트북 데이타가 전부 날아가버리고 말았고, 바로 그 다음날 저녁 퇴근 시간에 교통 사고를 당해서 2주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시바 료타로만 데이타에 기반한 글쓰기를 하는 건 아니다. 나역시 데이타에 의존하는 편이라 노트북 데이타가 날아가버린 것은 나로서는 교통사고보다 큰 사고였다. 데이타복구센터에 문의해서 자료 파일들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복구된 자료 데이타가 무려 20만 개에 이르는데다 그 파일명이 모두 아라비아 숫자들로 되어 있어 하루에 100개씩만 열어본다고 하더라도 2,000일이 걸리는 대공사라 데이타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시인이나 그간 책읽기를 하며 만든 데이타, 내 홈피에 업뎃하기 위해 만들어 논 자료들 모두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8월부터는 홈피도 잠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1년간 쉬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서재에서 하는 일들은 과거 내가 구축해 만들었던 데이타들을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하여간 계획은 계획이고, 상황이 안된다면 "에너자이저" 광고처럼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 데이타를 날려먹은 경험에 따라 나는 외장하드 디스크를 하나 구입했다. 아무리 바빠도 한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데이타를 백업하게 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작년에 나는 맑스.엥겔스 저작선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가 포기한 경험에 따라 올해는 시집을 중심으로 한 책읽기를 하되 1/4분기엔 한국시를, 2/4분기엔 역사서를, 3/4분기엔 외국시를 읽고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1/4분기엔 한국시 그 중에서도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1권부터 35권까지 읽었다. 권수로 치자면 중간에 구입하지 않은 시집들도 있으니 대략 20여권 정도 되는 것 같다.

1분기가 3개월이니 중간에 계획에 없던 책들을 읽을 것까지 포함하면 대략 90여일간 40권 정도의 책을 읽은 것 같다. 2.5일에 한 권꼴로 읽은 셈이 된다. 하루는 시집 한 권을 읽고 거기에 포스트 잇을 붙인 뒤에 그 시인의 약력과 내가 좋게 읽은 시 몇 편을 타이핑하여 정리해둔다. 그리고 시인의 글이나 비평 중에서 인상적이라 여겨 밑줄 친 부분도 함께 정리하는 것으로 책 한 권을 읽은 것으로 쳤다. 시집 한 권당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략 5-6편의 마음에 드는 시가 나오니까 지금 내 노트북엔 원래대로라면 100편 이상의 시가 정리되어 있어야 하지만 중간에 노트북 데이타를 날려먹는 바람에 다시 타이핑하는 수고를 경험했으니 실제로 정리되어 있는 시는 50여 편 정도가 전부다. 그것도 다른 책을 읽는 틈틈이 정리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2/4분기에 나는 서양 중세사에 대한 책읽기를 시도했다. 서양 고대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호메로스부터 출발해서 헤로도투스를 읽고, 그외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던가? 예전에 그런 책들을 한 차례씩은 읽은 경험이 있어서 서양 고대사가 그리 낯설지는 않은 편이었다. 대신에 서양중세사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암흑천지를 헤매듯 했다. 다행히 최근 서양중세사에 대한 좋은 책들이 제법 출간되었으므로 나는 서양중세사에 대한 책들을 이참에 좀 읽어두기로 했다. 물론 한 번에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므로 1차 도서목록에 포함된 것들을 읽은 뒤엔 1차 목록에서 누락되었거나 1차 도서목록에 포함되긴 했으나 제대로 읽지 못한 것들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그런 계획하에 읽었던 책들이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중세로의 초대", 자크 르 고프의 "중세에 살기", 요한 호이징하의 "중세의 가을",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죽음의 역사", '죽음 앞에 선 인간" 등과 "중세의 빛과 그림자", "로마 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1.2" 등을 읽었었다.

3/4분기에 나는 주로 외국시들을 읽었다. 청하외국시인선을 죄다 사모으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면서 민음사가 새로운 판형으로 출판한 시집들과 솔출판사에서 출판한 외국 시인선들을 주로 읽었다.

라파엘 알베르티의 "죽음의 황소", 파블로 네루다의 "인어와 술꾼들의 우화", 기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 프랑시스 퐁주의 "일요일 또는 예술가",  니카노르 파라의 "아가씨와 죽음", 장 주네의 "사형수", 로르카의 "사랑의 시체", 기유빅의 "가죽이 벗겨진 소", 예이츠의 "1916년 부활절" 등과 민음사 외국 시인선 가운데 로트레아몽, 랭보, 발레리, 아폴리네르, 발레리, 엘뤼아르, 괴테, 니체, 릴케, 김소월, 피츠제랄드, 말라르메, 프레베르, 베를렌, 워즈워스, 휘트먼, 딜런 토마스, 헤세, 프랑시스 잠, 셰익스피어, D.H.로렌스, 롱펠로, 존 단, 키이츠, 에밀리 디킨슨, 빅토르 위고, 블레이크, 투르게네프, 바이런, 셀리, 니시와키 준사부로, 휠덜린, 키타하라 하쿠슈, 이사카와 타쿠보쿠, 하기와라 하쿠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빌헬름 뮐러, 에우제니오 몬탈레 등을 읽었다. 그리고 김남주 번역 시집 1 "은박지에 새긴 사랑"과 두번째 권인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읽었다. 마야코프스키와 루이 아라공 등은 이 시집에서 읽은 것들이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짜리를 읽고 있다.

3/4분기에 나는 "책에 관한 책들"이란 주제로 테마 서평 비슷한 것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몇 권의 책을 읽었는데, 한상범의 "금서, 세상을 바꾼 책", 크리스티아네 취른트의 "책-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의 "내가 읽은 책과 그림" 전사섭의 "장충동 김씨를 위한 책 이야기", 로버트 다운스의 "교과서가 죽인 책들", 사사키 다케시의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과 모로하시 데쓰지의 "중국고전명언사전"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 -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 "book+ing 책과 만나다" 등을 읽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청탁 원고 자체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제가 기고하지 않기로 해 버려서 결국 공연히 책만 읽어댔다.

아, "항우와 유방"은 틈나는대로 심심풀이 삼아 읽었던 책이고, "벌거벗은 여자"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는 신간 중에 관심이 많이 가는 분야라 그냥 쭈욱 읽었다.

대충 정리해보니 올해의 책읽기는 1/4분기부터 3/4분기까지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어쩌면 책이란 건 매시간 애인의 손에 건네주던 선물주기와 같은 것이다. 새로운 책, 새로운 지식을 찾아 그때마다 관심가는 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의 계획을 짜고 그 아래에서 나에게 상을 주듯 책을 읽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한 분야에 해당하는 책들을 쭉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한 분야에 대해 식견이란 것도 쌓이기 마련이다. 4/4분기엔 무엇을 읽을까? 글쎄.... 지금 현재로서는 계획이 없다. 남은 기간동안엔 정말 옆에 쌓여있기는 했으나 그간 읽어대지 못했던 책들을 읽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내년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다. 그게 뭘까? 흐흐, 글쎄... 그건 내년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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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10-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추천하시다니... 흐흐, 기쁩니다.

stella.K 2004-10-0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르카의 "사랑의 시체". 어, 나도 읽었는데...바람구두님도 읽으셨군요. 기뻐요. 같은 책을 읽게되서. 하하. 추천!

stella.K 2004-10-0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어때서요?

urblue 2004-10-0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관심가는 분야가 생기면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찾아서 한꺼번에 몰아보고는 했습니다만, 님의 리스트는, 보는 것만으로도 질립니다. -_-;
왠지 편안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바람구두 2004-10-0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실테고...
urblue님! 그러고보니 마이리스트 만들어 올린지도 제법 오래전 일이네요. 흐흐.
속삭이신님! 말씀 안하신다고 모르겠나이까?

stella.K 2004-10-02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내가 뭘 잊었다는 것인지...? 시집요? 누구한테 받았는가 하는 거 말씀인가요? 그거라면...글쎄요.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리 누구한테 받았더라? 하하.

비로그인 2004-10-02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바람구두님의 그 긴 글은 엄청난 데이타의 힘이었군요.
하지만... 간혹.
글이 너무 길고, 정보의 질보다는 양에 감탄하다가 그냥 지나갈 때가 더 많습니다.
저만 그러는지 몰라도.
바람구두님, 데이타에 갇히지는 마시고...
날아간 데이타, 날아가도록 내비둬두 되지 않을까요?
가끔 너무 게을러서 미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저는,
경탄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제가 사는 방식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분들을 꼭 뵙게 되는군요.
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