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읽기 - 05

말을 배우는 방법은 국적, 인종과 상관없이 같다

얼마전 "연합뉴스"를 보는데 재미난 외신기사 하나가 올랐더군요. "영어든 한국어든 아기가 말 배우는 방법은 같다"는 기사였는데,  지난 15일 "월 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 아동건강 및 인적 발달 연구소'가 영어, 한국어 등 7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배우고 있는 유아 26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아기들은 모두 명사를 먼저 배운 뒤  동사와  형용사를 학습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합니다. 내용인즉 어느 나라에서든 아기들에게 언어를 습득시키기 위한 방식에서는 모든 나라에서 명사가 다른 어떤 말보다 더 빈번하게 사용됐고  여기에는 명사가 강조되는 미국 영어와 동사가 강조되는 한국어를 배우는 아기들간에 차이가 없었다는 건데요.

모든 언어권의 아기들은 평균적으로 300개에 가까운 명사를 알고 있었고 여기에는 동물, 장난감, 신체 일부 등을 지칭하는 단어가 포함돼 있다. 또 동사로는 `놀다' 등 행동을 지칭하는 단어를 약 100개 가량 알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명사를 먼저 배우게 되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명사라고 할 때 지나치게 추상적인 단어들을 먼저 연상하지만 않는다면, 예를 들어 "사랑, 슬픔, 행복" 같은 것들 말고, 자동차, 사과, 나, 너, 그 등 실체가 명확한 것들을 배우기가 손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명확하다는 건,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이라는 뜻이죠.

그에 비해 동사나 형용사는 더 추상적이고 아마도 유아에게는 파악하기에 너무  어려운 개념일 거라고 연구자들은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종종 농담삼아 "사랑"이나 "슬픔", "외로움"과 같은 명사들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거나 형용사라고 말하곤 했는데, "사랑"은 문법상은 명사일지 몰라도 그건 여러 감정 중 하나를 의미하는 명사라기 보다는,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이거나 동사에 가깝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랑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지녔다면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 일에 목숨걸지는 않겠지요. 어찌되었거나 독서도 이와 한가지일 겁니다. 앞서 책읽기의 여러 방법들 가운데 저만의 독서술이라고 할까요? 책 한 권을 읽을 때 저는 "어떻게 하는지"라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독서의 기술을 말씀드렸는데, 참고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제가 모든 책을 저렇게 읽지도 않을 뿐더러 저런 방법이 꼭 좋은 방법일리도 없겠지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계통밟기

오늘은 "계통 밟아 읽는 책 이야기"를 하기로 했어요. "계통 밟아 읽는"이란 말을 할 때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하나는 어떤 책을 읽을 거냐?는 선택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계통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겁니다. 앞서 아기들도 언어를 습득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지만, 우선 사물의 이름이라 할 수 있는 명사, 기본적인 어휘 수를 늘려가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어려서 읽는 책읽기란 그렇게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여러 흥미들, 기본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상식이랄까, 교양이랄까 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학교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들은 대개 두 부류라 생각하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한 부류는 괜히 교만을 떠느라 그러는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학교에서 얻은 지식보다 학교 교육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들, 가령, 왕따나 차별과 같은 일들로 상처 받은 기억 때문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학교 교육에 대해서야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말 중요한 것들은 대개 학교에서 배웁니다. 따지고 보면 계통을 밟는다는 말 자체가 학교에서라면 당연히 존재하는 커리큘럼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보자는 말이니까요.

김건우 선생의 책 "옛사람 59인의 공부산책"의 제2부 첫장에는 "공부할 때 차례를 지켜라"란 말이 나옵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국민이 의무교육을 받는 시대는 아니었음에도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대개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쳤습니다. 책 읽기에 대한 차례가 규정되어 있던 것이죠. 또, 김성철, 허경진 선생이 지은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을 보면 그 무렵의 아이들은 한자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천자문"을 배웠다고 합니다. "천자문"을 배운 뒤에 '책씻이' 혹은 '책걸이'란 걸 하고 그런 뒤에 다시 "동몽선습"을 읽습니다. 이를 마친 뒤에는 "사서"와 "오경"을 읽지요. 그런 뒤에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가지를 쳐 나갑니다. 즉,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오경"은 당시 사대부 가문의 필독서이자 교과서였던 셈입니다. 여성이 경우에도 명문가의 자손들은 "소학"이나 "삼강행실도"와 같이 주로 성리학적인 이념에 따라 주로 수양도덕서들을 많이 읽혔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소혜왕후(인수대비)가 지은 "내훈"이 필독서였습니다.

이 시대 사대부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독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날마다 책 읽는 것이 생활이었고, 이렇게 평생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니 자연 독서량도 엄청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요새 같이 책의 종수가 다양하지 않았을 테니 평생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을 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볼 일이었겠지요. 어찌되었든 이들은 그냥 한 번 읽었으니 되었다 하고 책을 덮은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아침 밥상이 나올 때까지 "논어"의 한 구절을 다시 읽고, 아침 밥상 물리고, 다시 "대학" 읽고, "맹자" 읽고 의문나는 부분, 의문이 풀리지 않는 부분은 다시 골머리를 앓으며 읽곤 했습니다. 앞서 말한 김건우 선생의 책 이야기에 따르면 같은 책을 1,100여번 읽은 선비도 있었다고 하니 이 당시의 독서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당시의 선비들이 주야장창 책만 본 건 아닙니다. 당시의 선비들은 학자이자 동시에 도학자(철학)이고, 시인이면서, 작가이고, 그런가하면 음악가(거문고는 당시 선비들의 필수 악기처럼 대접받았습니다)이면서 경세치용하는 정치인이기도 했지요.  

체계를 세우는 여러가지 방법 - 단, 진리는 없다

게오르규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했던 유명한 말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시대"의 공부란 그런 고전의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네들은 고전이 곧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 믿었고, 그외에 다른 독서 역시 고전을 독해하고, 자신만의 입론을 할 수 있는 첩경으로 여겼기 때문이죠. 게다가 서양 중세가 그러했듯, 동양 중세 특히나 조선의 학문이란 성리학이 절대 진리에 버금가는 학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제가 생각하는 "계통 밟아 책읽기"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봐야겠습니다. 과학(科學, science)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과학이란 줄기를 세우고, 그에 따라 체계를 잡아가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말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이란 정의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체계가 없는 학문은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앞서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종종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요?" 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이 질문은 체계를 밟는다는 의미에서 매우 비논리적인 질문입니다. 마치 "나는 사랑해!"라고 선언해버리는 것과 같지요. 이렇게 말해버리면 다시 여러 차례의 반문을 거쳐야만 합니다. "사랑해?" "누굴?" "왜?" "어떻게 그렇게 됐어?" 라고 말이죠. 세상에 무수히 많은 책 중에서 그 사람에게 합당한 어떤 책을 추천하는 게 옳을지 알 수 없고, 그의 관심이 어느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나는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어도 상대방에겐 고문일 수도 있는 게 문화상품 "책"의 취약점 아니겠습니까?

책을 읽는데 있어 조급함은 최대 금물입니다. 오늘 중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꿰뚫을 수 있는 방법은 누구에게도 없거든요. 가령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는데, 책 읽는 행위도 역시 마라톤  42.195km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한글을 익히면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지만, 걷기를 배웠다고 해서 모두가 마라토너로 나설 수 없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음악이란 장르가 있습니다. 제 경우엔 클래식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거나 독서하거나 음악듣기를 아직까지 시도한 바가 없어서 이 분야 역시 다른 음악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취약한 분야 중 하나입니다. 어찌되었든 음악을 듣기 위한 특별한 준비는 필요없지만 만약 클래식음악을 체계적으로 듣고 이 분야에 대해서 좀더 잘 알고 싶다면 그에 따른 공부가 필요하겠죠.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므로 본인에게 적당하다 싶은 방법을 채택하면 될 겁니다. 우선, 서양음악사 책 한 권을 사서 서양의 고전음악사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살피면서 그 순서에 합당한 작곡가들의 대표곡들을 하나하나 구해서 들어보는 것도 방법일 겁니다. 아니면 서양음악 이론서를 사서 그에 나오는 교향곡이나 소나타와 같이 형식으로 쫒아가는 방법도 있고, 악기별로 쫓아가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오늘밤 천하의 진리를 배우리...

다만 이 모든 걸 한꺼번에 해치우고 싶다는 욕심은 금물입니다. 예를 들어 "그라모폰 "이란 유명한 음악잡지가 있다고 치죠. 이 음악잡지를 비롯해 펭귄가이드 등은 클래식 음반에 별점을 매겨 품평합니다. 그라모폰에서 선정한 100대 명반 시리즈를 구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라모폰에서 선정한 100대 명반을 통째로 구입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이렇게 구입해놓았다고 해서 음악을 듣는 귀가 저절로 열리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명반선만 쫒아가다가 "에이, 뭐 이래", 하고 중도에 지쳐 떨어지는 경우가 외려 더 많지요. 이걸 마라톤에 비유하면 페이스 오버인 셈입니다. 즐길 줄 모르는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친다는 건, 극히 일부의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예습 복습 철저히란 말을 귀에 마르고 닳도록 들어서 뭐든지 미리 앞서서 배워두고는 정작 공부해야 할 때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재미를 누리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리죠. 하나를 배우더라도 제대로 끝까지 이치를 깨우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독서나 문화를 즐기는 자세에 있어서 무엇이든 속성으로 해치우고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동기부여의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속성으로 배우고 아는 척 하는 일은 남들 앞에서야 즐거운지 모르지만 돌아서면 허전하기 그지 없는 일이죠. 예를 들어 미술평론가가 되길 희망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하고, 미술사조는 물론 당시 역사상의 연대표까지 줄줄이 꿰뚫고, 거장은 물론 지난 시대의 소소하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들의 작품까지 죄다 기억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결국 미술평론가가 되지 못했어요? 왜 그럴까요?

그는 그림을 볼 줄 몰랐거든요. 자기만의 시선으로...

마찬가지로 계통을 밟아 책을 읽는다는 것도 논리적, 체계적인 공부만으로 가능한 건 아닙니다. 앞서 클래식음악을 듣는 여러가지 방법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그렇듯 계통이란 모로 가도 서울로 가는 방법인 거죠. 지나치게 커리큘럼에 의존하는 방식이 때로 음악이 줄 수 있는 즐거움, 미술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아가거든요. 남이 지어논 이야기, 남이 세워준 계통을 따라 읽는 것은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적기는 하지만 스스로 지적인 여행의 오솔길을 걸어보지 않고는 제대로 된 심미안을 기를 수 없는 법이죠. 계통 밟아 책 읽기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몸 풀기 차원에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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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18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토요일이라 그런가? 댓글이 저조하네요. 추천도 늦구요.

바람구두 2004-09-18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연애하느라 바쁜 모양인듯... 흐흐, 주6일 근무하는 저 같은 직장인만 불쌍하죠. 흑흑

_ 2004-09-1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나 문화를 즐기는 자세에 있어서 무엇이든 속성으로 해치우고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동기부여의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속성으로 배우고 아는 척 하는게 남들 앞에서야 즐거운지 몰라도 돌아서면 허전하기 그지 없는 일이죠."

제가 처음 책을 접하게 된 계기가 저거였어요 ㅠ_ㅠ
이것저것 그저 알고자 하는 것만 늘어서, 아무거나 그냥 내키는 데로, 휭휭 읽었더니, 결국은 어느것 하나 체계도 잡히지 않고, 공허한 상태가 바로 저입니다. 크흑 ㅠ_ㅠ

오늘도 추천발사하고~^^

바람구두 2004-09-1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버드나무님의 글이 인용한 부분을 보니 부끄럽기 그지 없네요. 분명히 저에게도 그런 동기부여는 있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나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또 한 가지 이유는 글 올릴 때 교정을 한 번도 안 보고 그냥 올리다보니 나중에 보면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게 눈에 띈다는 거죠.

stella.K 2004-09-1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연애하더라도 바람구두님 글 읽고 데이트에 나갈꺼여요. ㅋㅋ.

바람구두 2004-09-1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에서 걸립니다만... 흐흐.

stella.K 2004-09-1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예리한 바람구두님!

가을산 2004-09-18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