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 - 파블로프의 개들이 사는 법...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먼저 시험문제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 대단하다는 칭찬 아닌 극언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난 그 사람 이름도 기억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즉, 나는 나의 기억력 따위는 애초에 믿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난 소문날 정도는 아니어도 메모광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다가라도 좋은 글귀는 빼놓지 않고 적어놓으려고 애쓴다. 시집 한 권을 읽을 때도 모르는 단어부터 시작해서, 좋은 시에는 모조리 포스트 잇을 붙인다. 물론 포스트잇을 붙이는 버릇은 최근에 생긴 것이다. 도통 책의 어느 부분에 밑줄을 쳤는지조차 기억하기 싫을 만큼 게으르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질리지 않는 대상이 있다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책이다. 불행히도 나는 사람조차 하나의 책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결과로 빚어진 폐해 몇 가지, 그 중 하나는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을 때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데이타를 빼놓지 않고 추려 보려는 마음을 갖는다. 최근 내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책 아니 사람은 "마냐"란 사람이다. 마냐님의 이벤트 공지 글을 보면서 나는 혼자 씨익 웃었다. 본의든 아니든 마냐님의 이 이벤트가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고 모르는 이들은 궁금할 수도 있겠다. 나는 마냐님의 서재에 실린 글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고 있다. 내가 책과 연애를 하듯 사람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다면... 분명히 나는 호색한이다. 그러나 책에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늘 서가의 맞은 편에 놓여야 하는 책이 있는 것처럼, 나는 절대적으로 인간을 편애한다.

나는 사람을 편애한다...

나는 책과 달리 사람만큼은 두루두루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게 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책은 집어던져도 반응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찢겨 나갈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반응한다. 나는 그걸 대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찔러보고 되돌아오는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런 뒤에 호감을 갖는다. 나는 책을 표지만 보고 사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호감만 가지고 사귀지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진지하되,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늘 상상해 보는 버릇이 있다. 다시 반복해서 사람을 책으로 간주할 때 종종 빚어지는 폐해 중 하나는 책과 달리 사람이 아무 때나 밑줄을 긋거나, 오탈자가 있다고 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때로 내가 읽는 책들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을 가할 때처럼 사람에 대해 그런 짓을 했다가 거의 냉혈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이미 여러 차례 누누이 밝힌 바 있지만 나의 여성혐오와 나의 여성숭배는 불과 10년여의 시간차를 두고 극적인 변환을 겪었다. 내가 여성을 혐오하던 시절의 나는 여성에게 말을 붙여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흔한 초등학교 동창회 한 번 나가본 적 없으니... 여성과 대화를 나눌 일도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여성숭배로 전환된 것은 물론 연애란 걸 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여성이 지닌 장점들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글쓰기에서도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의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낀 건 여성의 대화법이 남성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여성의 대화법이 지닌 미덕은 무엇보다 다양한 표현과 상대에 대한 배려, 이견에 대한 일차적인 긍정에 있다. 최근 사회에서 부르짖는 다원성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라는 주장을 여성들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해오고 있었던 거다(물론, 나는 그와 엇비슷한 맥락에서 남성적 글쓰기가 지닌 미덕도 긍정하고 있다).

나는 마냐님의 서재에 올린 마냐님의 글들을 시간차를 두고 천천히 읽어가고 있다. 그냥 천천히 읽어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아주 조심스럽게 읽고 있다. 때로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선의에 입각해서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하나의 코멘트를 달고 있다. 그렇게까지 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서재놀이를 하면서 누구 한 사람하고의 관계 맺기에 성공하고 싶은 대상 중 하나로 마냐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사람을 편애한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읽고 있는 까닭은 혹여 그런 노력과 정성이 다른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걸 거절하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어떤 책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책을 다 읽은 뒤에는 서재에 꽂아두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상대라 할지라도 그 상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마냐님의 이벤트가 요구하는 세 가지

마냐님의 이벤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대개의 정리벽이 심한 사람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이지만 나 역시 이렇게 저렇게 카테고리를 나눠 구분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하나는 자신의 리뷰 중 하나를 읽고, 그에 대한 집중적인 독해를 해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글쓰기 전체에 대한 비평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도저도 귀찮은 이들의 이벤트 참여도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한 것일 텐데... 자신이 이벤트 상품으로 내놓은 책 중에서 가지고 싶은 책을 지목해서 저 책을 본인이 소유해야 할 이유를 글로 올린 뒤 세 사람의 동의를 구하란 것이다. 그것이 이 이벤트가 요구하고 있는 사항들이다. 내가 추측컨대 마냐님이 원하는 결정적인 글은 자신의 글쓰기 전체에 대한 일종의 메타비평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즉, 이벤트 첫번째 문제는 그 메타비평에 대한 글쓰기를 어려워할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이벤트 세번째 문제는 이벤트에 대한 참여도를 증진시키고, 재미를 북돋기 위한 교묘한 장치이다. 

나는 위와 같은 이벤트 문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알라딘 서재지인들은 대개 둘째 문제에 집중할 것이다. 둘째. 알라딘 서재지인들은 나름대로 염치가 있는 사람들이므로 세번째 문제에 도전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나는 남들 안 하는 두번째 문제 - 마냐님의 글쓰기 문제 전체에 대한 메타비평 쪽으로 글을 올려야 할 것이고, 실제로 마냐님이 나의 서재에 와서 몇 번이나 독촉한 까닭도 나란 놈이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추측한 소산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마냐님의 글쓰기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혹자는 니가 그렇게 잘 났냐? 니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낸들 알리가 있나? 남의 가슴에 대못 쾅쾅 박는 말을 하더라도 미움 받지 않는 놈이 있고, 남의 귀에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하더라도 미운 놈이 있는 법이다. 이 경우 나는 전자이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나는 마냐님의 가슴에 대못 쾅쾅 박고,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 하련다. 하지만 이 이벤트가 가진 요소 세 가지는 말하고 가야 한다.  첫째. 타인에 의해 보여지는 자신에 대한 관심(퍼스낼리티),  둘째.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소통욕구, 셋째. 자신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픈 마음. 이건 인간에 대한 따스함을 지닌 이들의 공통된 욕심이기도 하다.

마냐님의 글쓰기가 지닌 미덕과 단점들

마냐님의 글쓰기가 지닌 최고의 미덕은 간결한 문장과 정보전달력에 있다. 나는 매주말마다 거의 7-8개에 이르는 중앙지의 문화면 서평 기사들을 죄다 읽으려고 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취미가 취미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와우, 대단하다"는 식의 감탄사는 하지 마시라. 뭐든 일로 하면 끔찍하게 지겨운 법이니까). 그런 기자들의 글들을 읽노라면 천편일률적이란 생각이 절로 들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위, 그것이 업계의 관행이란 거다. 내 밑으로도 새끼 하나가 있다. 여자다. 내가 내 부하 직원에게 강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근성을 가지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당하란 것이다. 내가 그 녀석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고, 고참으로 훈련시키는 것처럼 기자들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기사문을 써서 데스크에 올리면 이미 훈련 받아 머리가 굳을 대로 굳은 데스크는 으례적으로 밑줄 좌악 긋고, 심지어는 아무 말없이 되돌려주면서 다시 써오라고 시킨다.

그건 뭐냐면 기사문의 일반적인 원칙들에 충실하게 글을 쓰라는 무언의 지시이고, 압력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너의 감성이나 감각, 지성이나 판단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 만들어준 와꾸(틀)에 맞춰서 글을 쓰라는 훈련이다. 파블로프의 개들은 매일같이 데스크의 훈련을 받는다. 그러다보니 이 신문사 기자나, 저 신문사 기자나 글 쓴 것들을 보면 대개 비슷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신문사 기자들의 팔자가 늘어진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몇몇 메이저 신문사들을 제외하고 대개의 신문사들은 대학이 교수 숫자에 비해 늘 학생 숫자가 넘치는 것처럼 다뤄야 하는 기사의 종수에 비해 기자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종종 몇몇 신문이 동일한 책에 대해 쓴 서평을 보다보면 너무나 흡사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보도자료에 입각해서 쓰기 때문이다.

내가 마냐님이 기자란 걸 눈치채기 전부터 몇몇 글들을 읽으면서 이건 아마 신문기사를 스크랩해서 짜집기한 모양이란 혐의를 두었던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마냐님 글이 익숙하고 편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그것이 간결한 문장과 정보전달력에도 있지만 우리가 신문기사를 통해 익히 보아오던 글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낯익은 것은 편하다. 그러나 낯이 익은 것은 동시에 파괴력이 약하다. 솔직히 마냐님의 서평 글 가운데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들은 기사화되었던 책들로부터 출발한 것들이 아니라 그냥 마냐님이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부터 출발한 리뷰들이다. 그 이유는 그 글들에서야 비로소 마냐님의 개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이다. 종종 마냐님의 글쓰기는 남들은 관용의 미덕이라고 하지만 내 보기엔 '눈치보기'로 여겨질 때가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껏 노력해서 글 쓰면서 험담할 필요가 없다는 서평 본래의 특징 (험한 평을 들어야 하는 책은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면 기사로 다뤄서 띄워주기보다는 무시하는 게 약이니까.)과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매체 글쓰기의 특성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피판한다는 건 쌈닭기질이 있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는 분야에 대해 최소한 자신의 신념이 있어야 가능하다.  

알라딘 서재에서의 리뷰쓰기

나는 사람을 편애한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말은 자신있게 말하지만 종종 이런 나의 말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그 돌은 내 말이 틀렸다거나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이런 솔직함이 싫어서일 거다. 우리가 누군가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심장이 열손가락 중 어느 하나를 편애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존재에 대해 공평하게 애정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 건 엄청난 환상이다. 그건 리뷰를 포함해서 모든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은 읽은 뒤에 마음에서 우러나와 리뷰를 쓸 수도 있지만, 어떤 책은 어쩔 수 없이 쓰여져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 글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있을지 몰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의 시선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는 종종 감춰져 버린다.

종종 알라딘 서재지인 가운데서도 길게 쓰는 리뷰,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리뷰에 대해 불필요하단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분들의 팔뚝에 이런 스탬프를 찍어주고 싶다. "냉정한!"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개인의 리뷰가 아니라 이 책이 살만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할 수 있는 일종의 가이드북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나는 책이란 상품만이 유일하게 물질적 필요보다는 정신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는 책의 가치를 모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이곳 알라딘 서재에 올려논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운데(물론 나도 포함해서 알라딘 측이 제공하는 5,000원의 장려금이 탐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동기유발은 될 수 있어도 목적은 될 수 없다) 누구도 돈을 목적으로 글을 올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라딘에 올리는 리뷰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을 쓰는 이들이 서재를 공개하는 것은 자신의 산업기밀을 노출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위해 옛사람들의 규범 - 신언서판 - 을 따르는 일이 종종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타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친구들을 보라는 말도 있듯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읽는 책을 살피는 것도 한 방법일 게다.

서재 - 영혼의 떨림

그런 점에서 서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혼의 떨림을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내가 서재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최근 나는 마냐님의 떨림을 느꼈다. 나중에 보니 그건 내가 느끼기 이전부터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은 인생이 더이상 치열하지 않다거나 공허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더이상 치열하지 않다이고, 공허하다는 징후로 읽혔다. 그 원인이야 무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마냐님에게 처음 끌렸던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스함, 인간에 대한..." (솔직히 이 대목에 오면 제가 좀 움츠러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본래 제가 누군가에게 좋은 말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듯 스스로가 재수없어지는 편이라서 그렇습니다. ) 세상이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자기 안으로 들여와 제 몸의 상처로 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지요. 마냐님의 리뷰에선 그런 징후를 맡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다른 글들 예를 들어 "궁시렁" 카테고리의 글들에서는 그런 냄새가 납니다.

그 감정이란 건 이런 거겠지요. 가끔 제 안식구는 마트에 가서 돈을 좀더 주고 유기농 농산물을 사옵니다. 비싼 유기농 양배추를 쪼개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면서, 브로콜리를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도 그런 생각은 듭니다. 세상 모두가 병들어 있는데, 나는 과연 이런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하는 반성 같은 것 말이다. 종종 반성이 7첩반상에 조금씩 맛뵈기로 올려진 반찬처럼 누추해보일 때가 있으나, 그러나 어쩌랴. 우리 모두 소시민인 것을... 나는 종종 좀더 격하고, 거센 어조로 사회를 비판하는 이들의 격렬한 몸짓에서 보이는 도덕에서 낯익은 우월주의를 본다. 마치 오늘날 개량한복이 전통도, 개혁도 아닌 이상함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것처럼 치열하다는 건 종종 치졸함과 연결되곤 하는 것이다.

나는 마냐님의 글에서 종종 엿보이는 그런 아이 엄마로서, 혹은 여성으로 남들보다는 그래도 조금 나은 조건(즉, 이건 기자니까, 좀더 성질이 지랄같아도 직업적으로 이해된다거나 남자들과 당당하게 맞담배를 피더라도 그러려니 한다거나, 남자인 후배들에게 승질부려도 이해된다거나 하는 거겠지)이랄 수 있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커리어 우먼으로서 누리는 혜택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곳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동시에 나는 마냐님의 글쓰기가 마냐님의 이런 상처들에 붙는 일회용 반창고가 되는 것을 감시하고 싶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이만큼 했음 되었지 하거나, 내 위치에서, 내 처지에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한다. 반성이 반찬이 되는 순간이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실패해도 그만이다. 이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한 개인으로서는 진짜로 패배하는 순간이다. 마치 예전의 썰렁한 개그에 등장하는 "동굴개그"처럼 우리는 인생이란 동굴에서 "인정하면 그 순간 진짜로 죽는"다.

자본주의라는 수레바퀴 밑에서

우리나라는 직업연주가들을 인정해주지 못한다. 아니, 인정은 해주지만 그네들이 연주만해서는 먹고 살게 해주지 않는다. 직업연주가들은 직업으로 교수나 교사가 되어야 한다. 평론가들이 평론만으로 먹고 살수도 없다. 그네들은 평론가이면서 동시에 교수나 교사가 되어야 한다. 기자가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네들이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다. 주말에 읽는 서평 기사들을 읽으면서 어떤 기자는 그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어떤 기자는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취재원들을 통해 얻어낸 내용을 확인도 없이 앵무새처럼 다시 옮기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기자들은 무식하다. 무식한 게 힘만 "쎄"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기자들은 유식하고, 그네들에게는 힘이 없다. 나는 기자들의 기사가 큰 파장을 불러올 때, 그 무서운 파괴력에 놀랄 때가 있으면서도 어떤 기사들은 그대로 묻혀버리고 마는 순간도 본다. 매스미디어의 힘은 스트레이트에서 나오기 보다는 잽에서 나오고, 스트레이트를 만드는 건 기자지만, 잽을 만드는 건 시장과 권력의 힘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중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중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가 된다. 마냐님의 글쓰기에 대해 이런저런 토를 달면서도 마음 한 쪽이 후끈하니 아프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타인과 대화를 나눌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 또다시 잔소리를 하는 건 잔인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마치 지금까지 보고 있던 TV만화를 다 보고, 금방 숙제를 하려던 마음에 있던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쟁알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책 중에 어떤 책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들의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 때로 엎어지고, 상처입고, 엉엉 울면서, 욕심도 부렸다가 금방 쌜죽해지기도 하면서 그네들의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나는 마냐님도 역시 그렇게 자신의 스토리를 꾸준하게 진행해나갈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치열하다는 건 온몸으로 밀고 갈때에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미덕이다. 온몸으로 밀고 간다는 것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마냐님의 글에서 마냐님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평을 종종 남겼었다. 그러나 그런 불평은 시정되어야 할 것 같다. 마냐님의 글이 비록 미문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글이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더라도, 나는 최소한 그 글이 주는  느낌과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글이 아닌가.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좀더 지켜보아야 겠다. 내가 잘 하는 일들 중 하나가 누군가를 오랫동안 지켜봐주는 일이긴 하다. 마냐라는 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좌하고 읽어야 할 책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랜 걸음에 지쳤을 때 따뜻하게 한 마디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책이란 점은 별로 의심하고 싶지 않다. 파블로프의 개들도 실험 시간이 끝나면 여전히 개처럼 살아간다. 우리들도 역시 그 시간들이 끝나면 사람들처럼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나? (자본주의의 수레는 올라탄 사람도, 그걸 끌고 가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똑같이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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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9-0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여기서 추천해주시는 건 의미가 없어요. 마냐님 서재에 가서 해주셔야 하는데... 징징

urblue 2004-09-03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지요. ^^

2004-09-03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9-0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작동됩니다. 저도 모르게 팔이 나가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제 앞의 다섯분도 아마 그래서 추천을 했을 겁니다. 너무 엄청난 글이라서 달리 할말이 없습니다.

sooninara 2004-09-03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진우맘에게 헌정한 뻬이뻐보다 더 길어요...마냐님에대해 더 잘 알게되었습니다..

sooninara 2004-09-03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서재에서 추천해야하나요? 둘 다 할께요..

바람구두 2004-09-0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해석한다는 건... 시를 해석하고 정의하는 것과 같지요. N.플라이의 말에 따르면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던가요? 누군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오해를 하나 덧붙인다는 의미일 겝니다. 수니나라님... 오랜만에 뵙네요. 저는 놀러가지도 않으면서 추천까지 얻어먹다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조만간 한 번 글 남기겠습니다.

진/우맘 2004-09-0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제 뛰어나가면서 절반밖에 못 읽었다고 징징거리는 코멘트를 남겼는데...저장이 안 된 모양이네요.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화면 난독증이라고 해야 하나....컴 화면 속의 긴 글에 대해서는 독해력이 떨어지는 편인데, 그래도 이번 글을 찬찬이 잘 읽었습니다.
마냐님이 부럽네요. 사람이고 책이고 진지하게, 치열하게 부딪히느 바람구두님...그 필력도 부럽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