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최장집 선생이 진보에 대해 일갈하는 말씀을 했다. 노, 김 두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현재 민주당과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처한 상황을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다만, 나는 최장집 선생이 이야기하는 무책임하고 고민하지 않는 진보, 대안 없는 진보란 말이 한 편으론 억울하기도 하다. 리영희 선생 이후 어느새 최장집 선생의 네임 밸류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높은 반열에 있다. 윤건차 선생은 지식인지도에서 최장집 교수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로서 불행한 것 중 하나는 최장집 선생 정도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좌측에 서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현실이다. 불행히도.... 그렇다.
나는 가끔 최장집 선생과 당신이 일군 에꼴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지향이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허당은 한국사회에서 '지역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론 최장집 선생이 내린 결론이나 비판이란 것이 언론에 의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에 비해 실질적으론 내용(contents)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내가 불민한 탓이 크겠지만 당신과 당신의 그룹이 주장하는 바가 지금 이렇게 잘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만한 상식도 없는 사회인 탓이지, 당신이 주장하는 바가 새로운 지향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언론에 의해 논의되는 것에 비해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상식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에 토를 달 것도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결론은? 그래서 법이라는 상식 안에서 대안을 잘 모색해서 다음 선거에서는 잘 해보자는 말이다.
만약 영국이나 다른 여타 선진국에서라면 이런 이야기가 언론에 대서특필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그거 모르겠나? 물론 언론에 보도된 것만으로는 당신이 그날 했다는 이야기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나의 태만을 탓해도 하는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최장집 선생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겠단 말은 아니다. 다만 나 같은 일개 백면서생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정도로는 이 갑갑증을 풀기 어렵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내가 갑갑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본질적으로 작금의 위기는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보여준 지난 10년의 실패의 결과물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말하는 진보의 범위가 좀더 좌측으로 이동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현재의 집권세력이 이전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크게 구분되는 것은 잘 해봐야 두 가지 정도의 차이다. 하나는 통일(북한)에 대한 강경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촌스러운 민주주의다. 만약 이와 다른 대안이 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분류된 스펙트럼, '진보적 자유주의'의 범위 밖에 있다.
문제는 그 대안의 한 발은 지역주의 같은 전근대적이나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 고려해야 하고, 다른 한 발은 영미식 자유주의 정치경제제도를 내화한 한국 사회가 아닌 더 먼 어딘가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진보(자유주의)세력의 협소한 보폭으로 보았을 때, 가랑이 찢어지기 딱 좋은 형국이다. 게다가 MB정부의 밀어붙이기는 최장집 선생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워를 지니고 있다. 실질 권력(정치경제는 물론 문화권력)의 장악을 통해 역전 자체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성찰하고 대안을 만들어 가는 시늉만이라도 하기 위해선 우선 민주당 안에 중심축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민주당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이회창의 패배 이후 박근혜 대표체제로 강력하게 뭉치면서 여러 가지 쇼맨쉽을 보여주었지만 지금 민주당은 그럴 만한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잘 해야 '자멸'이다. '헤쳐모여' 없이 한나라당과 경쟁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부활은 어려워 보인다. 야당의 장기자랑 시간이 돌아오고 있다. (*어쨌든 최장집 선생의 말씀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가장 불편한 심정이 들었던 부분은 당신 자신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분이란 사실이고, 당신의 대안이 본질적으론 보수주의란 사실이다.)
그런데 정운찬 선생은 왜 그리 가셨나? 오늘 한겨레 그림판을 보니 MB가 일타 쓰리피를 했다고 나오던데, MB입장에선 어차피 심대평 카드가 안 될 바에는(이것도 이미 지역주의 포석이 아닌가 말이다. 한국에서 지역주의 정치판은 다소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변이다) 정운찬 카드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문제는 MB가 정운찬 선생을 경제전문가로 영입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가 스스로 충남의 아들을 자부하지 않았다면 구태여 낙점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만약 내가 '민주당'의 논평가였다면 한복 바지에 양복 입었다 정도로 말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라면 정운찬을 적극 지지해주었을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 입장에서 정운찬은 버린 카드가 된 셈이니 재 뿌리는 대신, 정운찬을 두둔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이제이"하는 심정으로 힘을 실어줘보는 것도 관전하는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물론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총리가 무슨 힘이 있겠나, 게다가 MB는 노무현 처럼 실세총리를 기용할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정운찬 선생 입장에서야 학자적 이미지 훼손(이미 지난 번에 식자층에는 훼손될 대로 훼손된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 자들이 무슨 힘이 있나)을 빼놓고는 손해 볼 것 하나 없다. MB정부에서 잘 하면 자기 공이고, 못하면 각을 세워 제2의 이회창이 되면 될 터이니 말이다.
다만 정운찬 선생의 정치감각이 과연 그 정도로 탁월할 것인가는 고민 좀 해봐야 한다. 서울대 출신으로 나 잘난 맛에 죽쑨 정치인들의 반열에 당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참고로 일단 앞서간 선배들로 이인제, 이회창이 있다). 만약 MB가 정운찬 총리를 실세 총리로 자신의 국정 운영 동반자로 삼아 정책적 전환을 이룬다면 정당의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을 위해선 단기적으로 좋은 일일 테고, 한승수 총리처럼 얼굴 마담에 그친다면 어차피 더 망가질 것도 없는 사람들끼리 대통령, 총리한 것이니 국민들 입장에서 손해날 것도 없는 일 아니겠나 싶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송곳'이라 했다. 이회창 총리가 자칭타칭 '대쪽'이라 하였으니 송곳은 대쪽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말은 어느 면으로 보자면 그저 이죽거림에 불과한 것이지만 정운찬 총리 내정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에게 보여주는 중도실용의 서민정치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단순한 쇼가 아니며 - 실제로 그것이 쇼에 불과할지라도 '정운찬'이란 인물 아이콘을 통해 - 실체를 지니게 될 가능성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40%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MB가 라디오 주례연설을 택했을 때, 내가 가장 주의깊게 살핀 것은 이 부분이었다. 그는 토론을 잘 하지 못하는 대통령이고, 토론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는 토론 대신 연설을 즐기고, 연설은 일방적인 대신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남는다. 히틀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 '말', 그 중에서도 '연설'이야 말로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 했다.
연설에 대해 논평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봐야 토론과 달리 한 단계 아래 수준으로 격하되는 것이며, 대안도 없이 힐난하는 격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여의도 정치를 비판하고, 관심 없다고 했다고 하여 노무현과 흡사하단 이야기를 하지만 내 보기엔 노무현 보다 어떤 의미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더욱 노련한 정치가다. 정치가 곧 민주적이란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명박의 정치프레임을 그냥 파시즘, 유사파시즘이라 비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대중을 정치적 그물망 안으로 호명하는 방식(프레임)을 살펴보면 MB정부가 대중을 호명하는 방식에 있어 상당히 노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B정부의 이미지정치는 쇼의 수준은 대단히 낮은 단계에서 이루어지만 그것이 곧바로 대중적인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