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구두"라는 닉네임을 스스로 분석해보다

처음 인터넷이란 걸 하게 되고, 남들처럼 나도 E-Mail계정을 하나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뭐라고 하지?' 고민하게 되었는데 아마 자식을 낳고 부모님이 고민하는 것처럼 고민하진 않았겠지만, 자신을 이름짓기한다는 건 분명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인격(personality)'와 '정체성(identity)'은 동전의 양면처럼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것인데, 간단하게 인격이란 '외부'(타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상정하고, 그에 의해 발현되는 개념인 반면에 '정체성'이란 외부보다는 자신의 내부가 좀더 중요한 법이죠. 아이디와 닉네임을 결정(이름짓기)한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거나 혹은 스스로 느끼는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고심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명을 짓되 아명은 '개똥이'처럼 천하고 흔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면엔 이름이 지닌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 '인격(personality)'이란 외부를 적극적으로 상정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인격이란 말은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격이란 타인의 의식에 의한 반사나 반성의 형태로 드러나는 표상(representation)인 셈인데, 좀더 풀어서 이야기해보면 인격이란 한 개인(주체)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할지에 대한 타인들의 예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우리들의 예상 혹은 우리가 일반적인 사회적인 관례상 이렇게 대응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전혀 다르게 행동할 때, 극단적으로는 '인격파탄'이란 말을 쓰는 것이죠. 혹은 그동안 그 어떤 이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때 그 사람이 낯설게 여겨지는 겁니다.(물론 제 아이디를 작명할 때, 이런 생각까지 할 만큼 복잡하게 생각한 건 아닙니다.^^)

이것저것 생각해보았는데 막상 이름을 지으려고 하니 좋은 이름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선점을 해버렸더군요. 아마도 그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인격과 걸맞은 이름들을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서 찾고자 했을 겁니다. 아니면 오프라인상에서의 이름을 알파벳 형태로 축약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 대학 다닐 때 제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였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닉네임을 바람구두로 했어요. 물론 한글로 소리 나는대로 "baramgudu"라고 해도 좋았을 텐데 제가 구태여 "windshoes"라는 당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조어를 만들어낸 것은 아마도 제가 소리보다는 뜻에 더 의미를 두는 편이라 그랬겠지요.

하여간 대학 다닐 때부터 치자면 15년, 인터넷을 시작한 때부터 기점으로 삼자면 8년간을 실명 대신 "바람구두"라는 닉네임으로 살았습니다. 만약 이름에도 힘이 있다면 아마 그 이름이 '인격'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제 정체성까지 쥐었다 놨다 할 만큼 오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애시당초 제 작명이 실재하는 제 정체성에 근접해 있던 것이라면 더욱 강화하는 측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어찌되었든 "바람구두"라는 닉네임으로 살아온 8년 동안 닉네임이 주는 후광 때문이랄까. 실재 저와 상관없이 그 이름이 주는 선입견들은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닉네임에 "바람"이 들어가서 그런지 "바람둥이" 이미지가 강화된 것 같기도 하고(뭐 그런 기질이 전혀 없다고는 절대 말 못하고요.), 무엇보다 "바람"과 "구두"의 결합으로 인해 "떠돌이" 이미지가 강한 것 같기도 하고요.

지난 주 토요일에 어느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언제나 떠나버릴 사람 같은 느낌'이란 말을 들었는데 아마 이런 욕망이 저만의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요 얼마전 개봉되어서 히트쳤던 해적 영화가 있었죠. 사실 장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런 류의 해적 영화도 계보를 살필 수 있을 만큼 끊임없이 반복재생산되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해적 영화가 주는 일탈, 거침없는 자유의 이미지 때문이겠죠. 그런데 저는 종종 "바람구두"에는 그런 떠돌이 이미지말고도 성실함의 이미지와 느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밑창이 닳아버린 구두,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인 낡은 구두에게서 받게 되는 주인장의 성실한 삶의 이력 같은 거 말이죠.

아마도 바람에게는 구두가 필요없을 겁니다. 평생토록 땅을 디딜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바람구두란 '소망하는 구두', '이루어지지 않을 욕망(결핍)에 대한 갈구' 혹은 그와 같은 모순된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는 그런 속내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천지를 끊임없이 떠돌고 싶어하는 이상주의자이자 로맨티스트인 '나'와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싶은 현실주의자인 '나' 사이에서...

이벤트까지는 아니어도 각자 자신의 닉네임이 담고 있는 이미지를 스스로 분석해 보거나 그 의미를 논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물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첫걸음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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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용 :)

체셔냥이는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거짓말 보태서 10번은 넘게 설명한 듯 ㅋㅋ
고로 난 패스- :)

바람구두 2007-07-09 16:46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이가 무슨 뜻인줄은 아는데 그대에겐 무슨 뜻이죠? 흐흐...
아니면 본인이 썼다는 페이퍼의 URL이라도 쫌...

비로그인 2007-07-09 20:06   좋아요 0 | URL
저도 바람구두님 하고 비슷하죠.
:)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체셔고양이,
웃음만 남기고 몸은 투명해지며 사라지는 체셔고양이,
때로 무심해보이는 길 안내자.

언젠가 흔적없이 떠나버릴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ㅎㅎ
당신들에게 미소와 길안내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
체셔고양이의 미소는 참으로 환타스틱 하지요.

사연 : 우울하고 진지한 농담 - <오래전 체셔고양이의 추억>
http://blog.aladdin.co.kr/yourmark/1254577

2007-07-09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0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9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0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7-07-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시리 비가 와서 그런가. 바람구두 님 서재 이미지에 무지 마음이 술렁술렁 심란하네... 흐.. --- 생뚱..

바람구두 2007-07-10 00:04   좋아요 0 | URL
남편 분 옆구리 쿡쿡 쑤시세요. ^^

chika 2007-07-0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웅~ 내 닉넴은 넘 단순해서;;;;

바람구두 2007-07-10 00:04   좋아요 0 | URL
단순한게 전 좋던데요. ^^(진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