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 느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기에
이방인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꾸미는 사람은 본질이 곧 꾸밈이 돼 버린다. 사람들과 나의 의지와 당위가 스스로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진실함은 진실해야 한다는 자의식도 존재하지 않는 말그대로 순진무구의 진실함이다. 그러한 진실함은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만나자 세상과의 이질감으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기대되는 역할과 우러나는 행위사이에 커다란 골이 패이는 시점이다.
어쩌란 말이냐 상황이야 어쨌거나 피곤할 때는 하품이 나오고 담배한 모금 피울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러한 설명은 부적절한 것이다. 소설 어디에도 자신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보이진 않는다.
<이방인>이 원인과 결과라는 '이야기'의 구성을 취하지 않는 것은 '이야기'화 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여기서 매사에 무심한(혹은 진실한) 뫼르소가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124쪽)고 생각한 시점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자주 점심을 해결하는 식당의 주인인 셀레스트는 뫼르소의 살인에 대해 참고인 진술을 하기 위해 법정에서 선다. 그는 뫼르소의 살인에 대하여
"내 생각으로서는 그건 하나의 불운입니다. 불운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압니다. 불운이라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에, 또! 내 생각으로서는 그건 하나의 불운입니다."
라고 주장하기 때문다. 셀레스트는 뫼르소를 변호(형량을 낮추기)하기 위하여 이렇게 이야기 하였겠지만, "불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반적 이해의 틀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음을 드러내기에 그것이 뫼르소의 감정을 동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무엇'을 '부조리'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쩌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현실의 한 국면을 따다가 선명히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부조리라는 단어는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현실을 드러내는 단어일 것이다.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이성적)와 부조리한 세계는 서로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 욕구가 강할수록 그것에 의해 포착된 세계는 부조리한 현실이 될 것이다.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