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었다.  사랑에 관한 매우 훌륭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
우리는 복잡한 사태를 볼/느낄 수 있지만 그에 합당한 표현력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이 괴리감이란... 
누군가 당신에게 왜 그(녀)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일생을 통해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 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개의 육체 중에서 나는 단지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 그렇지만 내 욕망의 특이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름짓기는 힘들어진다. 과녁의 정확함에 이름의 흔들림이 대응한다. 욕망의 속성은 부정확한 언표만을 만드는 데 있다. 언어의 이런 실패로부터 남은 흔적이 바로 '근사해'란 말이다.(41)  

 우리는 흔히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공유의 기호'들을 사용하곤 한다. 안습, 386, 박사... 이러한 단어의 목록들이 제시될 수 있다. 사전에 있는 단어들? 정도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신과의 공유기반이 약한  '이야기들'이 언제나 있다. 그건 뭘까?  그건 기호화되지 않았기에 당신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나 스스에게도 확립되지 않은 '느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내 이야기를...  내 욕망은 기호화되기 이전의 내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건 시작부터 벼랑같은 욕구다. 
당신에게 가닿기 위해서. 글쓰기를 추동하는 것을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중 강한 것은 사랑이리라. 그렇지만 욕망이 강할수록 벼랑은 쳠예해진다.

2.
저자는 데카르트를 인용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라르바투스 프로데오(Larvatus prodeo)---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70쪽)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이에게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꽤 자란 '나'는 당신에게 가면을 쓴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만 또한 '내가 가면을 썼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리킬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사랑하는 이가 감출 수 없는 욕구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72쪽) 비단 사랑하는 사람에게 뿐이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을라 치면 나는 1.가면을 쓰고 2.내가 가면을 썼다는 것을 은근히 당신에게 알린다.  이것이 잘 될수록(세련됨이라고 해야할까) 내 의도는 성공한다.


바르트는  책에서 A...Z 순서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하나의 딜레마는 사랑은 말해(쓰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형식중 지극히 강렬한 '사랑'이란 감정을 언어로 바꾸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듯 말해지기 어려운 주제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왜 그랬을까? 우리는 모두 쓰기 어려운 것에 대해 쓰고 싶다. 왜 그럴까?   물론 '독서모임'의 한 구성원으로서 리뷰를 쓸 의무가 있는 경우는 다르다. 음... 그럼 왜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자발적으로 짊어졌을까?

사랑은 (그것이 온다면) 하면 되는 것이고 멀어진다면 안하면 되는 것 아닐가? 왜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해야 할까?   

 

<사랑의 담론>의 일부분에 관한 간단한 느낌글입니다. 원문에는 사랑에 관한 매우 풍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으니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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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15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를 충동하는 욕망들 중 가장 큰 것도 사랑이군요.
욕망이 깊어질수록 벼랑이 첨예해진다는 생각에 공감이 되어요.
푸하님^^

푸하 2009-02-16 11:49   좋아요 0 | URL
혜경님, 공감해주시니 감사해요. 제가 자기 표현하는 게 참 서툴러서... 그런 감정이 좀 더 큰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2009-02-15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5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2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