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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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속삭임이 사랑인 줄 알았다. 짧은 기간 머무르면서 나를 흥밋거리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처음부터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수치가 되어 창녀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소박한 부엌에서의 자리를 지켰을 수 있었다. 그의 연락처도 없이 그가 떠났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펠리시아는 공황에 빠졌다. 그녀는 증조할머니의 돈 일부를 털어 조니를 찾아 낯선 세계를 헤매는 것을 선택한다.


 거듭되는 불경기로 사람들의 일자리는 쉽게 사라졌다. 조니가 다니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잔디깎이 공장을 수소문하지만 들르는 곳마다 공장이 폐쇄되었거나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조니의 아이를 임신한 채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의 사람들 속에서 펠리시아는 황망해한다.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로 떠도는 외국인 여자아이. 펠리시아는 힐디치가 남몰래 바라는 욕망을 충족시킬 도구였다. 젊은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매력적인 존재로 비쳐지기를 갈망하는 힐디치는 펠리시아의 연약한 처지를 이용해 도움을 주는 척하며 그녀와 함께 있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조니의 아이를 지운 죄책감에 고뇌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그녀 곁을 지킨 사람은 학대받은 적 있는 살인마였다. 힐디치의 진실을 깨달은 펠리시아는 간신히 탈출해 떠돌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이 겪은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아이를 지운 자신의 죄는 살인마로부터 도망친 것으로 상쇄되었다 느끼며 흘러갈 뿐인 현재에 스스로를 맡긴다.


 조니와 힐디치에게 펠리시아는 수단이었다. 타인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도구로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유희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으스댈 건수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자신의 부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행동은 잘못임을 아는 사람이 적다.

 

 펠리시아가 부당한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세상물정이었을까. 그녀는 순진했기 때문에, 어리석어서 이용당한 것일까? 나는 관계 맺기에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펠리시아는 어리석었다기 보다는 용감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조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믿었고, 불안한 상황에도 희망을 가졌다. 낯선 곳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그녀가 추구했던 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비록 그녀가 겪어야 했던 결과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얽매이는 것보다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거듭된 상실 속 단단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도 따스한 햇살 속에서 그녀만의 안온한 시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조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마치 뜻을 좇는 구도자처럼 고통을 극복하면서 삶을 잔잔하게 곱씹는다.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느끼고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면서 계속 나아간다.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실패한 지워진 삶. 어느 순간엔가 헛헛함과 원망이 한가득 흘러들어올 때 펠리시아는 다시 극복할 수 있을까. 조니, 그리고 힐디치를 겪으며 이전의 펠리시아는 사라진 것이 속상했다. 또 우리 사회에도 펠리시아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여자아이들이 많다. SNS로 연락해 현혹하고 기프티콘, 현금으로 취약한 아이들의 성을 사려 들거나 신체 사진 일부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약한 처벌을 받거나 아예 처벌받지 않기도 한다.


 타인에 대해 공감할 감수성이 부족하다면 문학작품으로나마 이해의 폭을 늘려야 하지 않을까. 이기적인 착취가 한 명의 개인적인 삶과 영혼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가늠하고 스스로 행동을 단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니와 힐디치처럼 취약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멈출 수 없을 것이며 언젠가는 잘못이 드러나 공동체로부터 배격되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품고 있는 깊이를 헤아리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되짚어 읽고 인물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잡생각이 들게 하면서 나를 옭아매는 사소한 갈등과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담담하게 흘려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파문을 그리다 잔잔해지는 물결처럼 여운이 남았다.




적의를 품은 어머니가 막아주리라는 영악한 계산속에 연락할 방법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 이 막돼먹은 녀석에게 속아 그녀가 겪어야 한 일을 생각하면 경악스럽다. 힐디치 씨는 함께 카페에 앉아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시도 때도 없이 흐르던 그 눈물을, 어느 공장에서 또 다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녀가 겪은 괴로움을, 그리고 뱃속의 아기를 지울 때 그녀가 느끼던 죄책감을 기억한다. - P265

밤이면 도시에 잔광이 어린다.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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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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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 후반의 삶은 불안과 기대로 꽉 차 있다. 특히 한국의 10대는 대학 진학에 대한 압박이 있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가족의 지원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학생들 중에서는 내일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무기력한 좌절을 겪는 아이들이 있다. 체류권을 인정받지 않은 부모가 한국에서 자녀를 기를 경우 해당 아동은 있으되 없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이야기이다.

  의료 보험을 받을 수 없어 병원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되고, 콘서트 예매도 안될 뿐더러 보험에 가입되지 않아 수학여행 등의 학교 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다. 학생들과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수는 있지만 대학 진학은 허용되지 않는다. 미등록 상태인 것을 들키게 될까봐 경찰 조사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꾹 참아 넘기는 일이 더 많다는 뜻이다. 언제 퇴거명령을 받게 될지 몰라 불안하다. 몇십 년을 살아온 한국을 떠나 한 번도 가지 않은 부모님의 모국에 갑자기 뚝 떨어지게 될 수도 있는, 연속성이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울증을 겪는 학생들도 있다.

  해외에서는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체류자격을 인정해주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있고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수십 년간 한국에 머무르며 생활한 이주민들에게는 지금보다는 좀더 허용적인 태도로 그들의 체류자격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부모의 선택 때문에 태어났을 때부터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존재가 거부되었던 아이들이라면 그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자신의 노력한 것에 따라 정당한 결과를 받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난민 문제에 관한 나의 생각은 그다지 트여있지 않았다. 지방의 범죄율을 높인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또한 종교 갈등, 테러의 위험들도 떠올랐다. 다르기 때문에 다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발생하는 편견 탓에 관련 문제에 깊이 생각하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그 문제 안에는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되지만 나는 안 되는 것을 꾸역꾸역 받아들이면서 이런 처지로 내몬 부모님을 원망하는 아이들. 기회를 보장받아야 할 젊음은 수 없이 부정당하면서 꺾이고 있었다.

  재작년에 교원으로서의 나는 다문화 사회를 생각하며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취득했다. 2017년에 우리 반으로 일본에서 이민 온 학생이 전학을 왔는데 한국어가 서툴었다. 취미 겸 학생을 돕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는데 우리 반 전학생의 노력이 훨씬 더 빨랐다. 드문드문 교과서 몇 페이지인지 일본어로 읽어줄 때 전학생은 몇 시간이 걸려서 일기 한 편을 써냈다. 학기 말까지는 서툰 발음이 남아있던 한국어가 다음 학년에서는 스스럼없이 다른 친구들과 길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내가 학생의 모국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학생이 한국어를 습득하게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빠르고 학생의 적응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국어 교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신청했다.

  내가 만날 학생들이 한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만 생각했었는데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살아가지만 평범한 삶을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어느 순간 지금의 삶이 끊겨나갈 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부모도 없이 한국에서 추방되어 낯선 타국에 뚝 떨어지게 될 삶을 상상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일까.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낸 내 친구가 이란으로 추방되어 폭력에 노출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험기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과 같이 이주아동을 도왔다는 학생은 난민과 관련된 내용을 강의하는 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합법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카림과 달리아에게 희망적인 기회가 부여되길 바란다. 달리아가 직접 쓴 시는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어 울림이 있었다. 그녀의 재능이 마음껏 실현될 수 있도록 지금의 제도가 보다 폭넓게 품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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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도 학교 가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 상처 입기 전에 알아야 할 현명한 교권 상식
김택수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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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와 변호사의 좌담을 책으로 엮어낸 이 책은 현장의 선생님들이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 관리자로부터 겪는 어려움을 다양하게 다룬다. 때로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해결한 방법을 설명하기도 하고 변호사를 통해 관련 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학교 현장과 관련된 법을 해설하는 책들은 이미 많았다. 이보람 변호사의 『학교폭력 대처법』 도 있고, 박종훈과 정혜민 변호사가 공저한 『교권, 법에서 답을 찾다』도 있다. 나는 정혜민 변호사의 법 관련 강의를 듣고 나서 책을 읽어보았는데 판례 중심으로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어떤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문제가 되는 지를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이 책은 앞의 두 책과 다르게 교사가 직면하는 학교 현장의 총체적인 어려움을 때로는 거시적으로 보거나, 또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학급의 세세한 면을 들여다 보는 학교 현장에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담았다. 길지 않은 책의 분량에 비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많아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만큼 막연하게 비쳐지는 때도 있었지만 공감이 가는 구절들이 많았다.

가장 이상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공식적인 창구 만들기이다. 지난 주 일요일 오후에도 학생의 개인 문자가 와서 전체적으로 지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오후에 또 학생의 개인 문의가 왔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마음이 든다. 기한 내에 알려야 하는 내용이 많고 원격 학습일, 등교 학습일이 나뉘어 있다보니 전달이 안될 때가 많아 개인 번호를 공개하였는데 퇴근 시간 이후에도 개인 문의가 온다는 것은 나의 휴식을 방해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만약 공식적인 창구가 있고 이를 통해서만 연락이 된다면 퇴근 시간 이후의 연락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한 감정이나 갈등이 더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하이클래스 앱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앱을 통해 정해진 시간 동안 문자와 전화를 주고 받도록 하였는데 작년에 써보니 중간에 끊기거나 연결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아 결국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방과 후 연락으로 불편한 마음을 느껴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하이클래스 앱을 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여러 사람과 다양한 입장이 얽혀 있는 학교이기에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이 많다.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고 다른 생각을 존중해야 하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교사를 대하는 사회적인 시선과 제도가 미비하다는 것에 동감하며 이를 보완하고 개선하기 위해 개인적인 의견을 쌓아나가는 노력을 계속해나가야겠다.


또한 온라인 학습 상황에 관계가 줄어든 학생들을 서로 이으려는 노력,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피드백으로 혼란스러운 학부모와 소통하려는 노력도 계속해나갈 것이다. 2주 정도 지났는데 학생들과의 연결 고리는 충분히 잘 만든 것 같아 내심 뿌듯하다. 새롭게 가입하게 된 연구회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교육과정 전문가로 학부모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올해도 힘차게 끌어나가야겠다.

*본 리뷰는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https://blog.naver.com/yahoo2805/222275336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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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그날 - 6.10민주항쟁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유승하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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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체제에서 국가가 자행한 폭력은 시민들의 자유 뿐만 아니라 소중한 생명까지 박탈했다. 희생된 시민들의 죽음은 거짓과 변명으로 덧씌워져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것이 아닌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6·10 민주항쟁의 촉매제가 되었던 故 박종철, 故 이한열의 죽음을 만화로 만든 『1987 그날』에서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와 함께 독재 체제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몇몇 정치 집단과 반공교육을 받은 5060을 제외하고는 민주화 운동 = 빨갱이로 보는 인식은 이제 거의 없다. 그렇지만 희생자에 대한 존중과 예우는 아직도 부족하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면서 앞으로도 국가의 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계속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책 『1987 그날』을 읽으면서 6·10 민주항쟁을 다룬 다른 책이나 영화보다 흡입력은 부족하지만 아픈 역사를 살아간 개인들에 대해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진주'와 사회에서 주입된 인식으로 학생 운동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나리'는 민주화 운동을 다룬 매체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흔한 캐릭터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는 새롭거나 특별한 것이 없었고 인물의 생각이나 대화도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아 흥미롭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니 '혜진'이 자살하고 고통 받는 어머니로 힘들어하는 '혜승'은 인상적이었다.



'혜진'은 학생 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참여할 수 없었다. 시대로 인한 우울감을 극복하지 못한 '혜진'을 떠나보내고 학생 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친구 '진주' 곁에서 언니가 느꼈을 감정을 되짚어보며 민주화 운동에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녀의 변화와 주변 인물의 고통을 느끼는 과정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느꼈을지 깊이 공감해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시민들의 자유가 탄압받는 일이 없도록 어려운 현실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던 시민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본 리뷰는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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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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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류층 귀족의 야회에 참여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야회 공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암시되기도 하고, 사교적 기술을 알고 얼마나 잘 처신하는가에 따라 각 인물들의 사회적 배경과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안나 파블로브나의 야회에서 우아한 옐렌과 피예르, 안드레이 공작은 파도가 치며 수면 위로 밀려오듯이 거대한 서사적 흐름 속에서 각각의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은 웅장하고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각 인물들이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개인들의 이야기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 후기에서 '역사가에게는 어떤 인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가라는 의미에서 영웅이 존재하지만, 예술가에게는 그 인물이 생활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영웅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되며 오직 인간만이 존재해야 한다.'(『전쟁과 평화 4권』, 539p)라고 밝혔다. 역사적 배경을 다루되 소설적 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뒤섞어 마치 잘 짜여진 또 하나의 세계를 축조해낸 그는 예술가로서의 목표를 한 번 더 되새기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그 목표를 이루었음에 동의하고 이 작품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듯이 나또한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역사적 사실과 개별적인 인물상 모두가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와서 무척 감명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사교계를 드나드는 부인과 그 밖의 자신을 옭아매는 여러 일상적이고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 안드레이 공작은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전쟁으로 떠나 오직 명예만을 추구하며 자신이 또 한 명의 나폴레옹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전쟁을 겪어내는 과정에서 전쟁의 폭력성과 무의미성을 확인하고 개인적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안드레이 공작이 생각하는 궤적을 따라가면서 남들보다 뽐낼 수 있는 무엇이 되고 싶은 그 영웅적 심리를 자아도취적인 유아적 사고로만 여겨 비난할 수는 없었다. 안드레이 공작이 속한 계층적 배경에 의해 그는 마땅히 명예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누구나 한 번쯤 평범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특별한 나를 꿈꾸게 된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적으로 뛰어나거나 또는 좋은 학벌 등으로 타인들 앞에 서는 것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꾸미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해준다. 일상적인 평범함 속에서 잠재되어 있었던 나의 탁월한 비범함이 순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짜릿한 즐거움을 주고 그 순간을 공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몰입과 집중을 이끌어낸다. 나폴레옹이 첫 승전한 장소처럼 안드레이 공작도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서 영웅이 되기를 바랐지만 일순 적의 공격으로 신체적 한계에 매몰된 채 쓰러진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과 움직일 수 없는 신체에 갇힌 그는 죽음의 순간을 생각한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에게 비쳐진 하늘의 모습을 읽으면서 잔뜩 부풀었던 명예욕, 성취욕이 사그라들며 무의미한 것에 소중한 생애를 모두 바치는 듯한 허무함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다. 그는 결국 살았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향을 따라가게 된다.

 안드레이 공작이 전쟁에 참전하고, 전쟁의 아픔을 겪어내면서 깨닫고 새롭게 추구하게 된 일상적 가치들은 안드레이 공작의 개별적인 성격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전쟁을 치러내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대왕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만약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대왕의 결정도 거대한 사회적 흐름의 일부로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지도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형성된 것이라면?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한 거대한 사회적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개인, 그리고 더 큰 개인, 그리고 그 개인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흐름이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작가는 또 묻고 되새기며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안드레이 공작은 가정적이고 일상적인 즐거움을 찾았지만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몸집이 작은 공작부인이 죽는다. 그녀를 죽게 만들었던 '임신'과 '출산', 그 죄책감으로 안드레이 공작은 일상을 흘려보내며 여동생 마리야와 아버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나타샤 로스토프,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운 그녀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느낀 안드레이 공작은 나타샤와의 약혼을 약속하지만 1년의 기약을 두며 언제든지 나타샤가 파혼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나타샤와 안드레이 공작의 관계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하며 그 둘 사이 관계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나타샤 본인에게도 생생한 젊음의 시기를 그저 흘려보내는 것 같아 초조하고 안달한다. 특히 나타샤의 마음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서 마치 오늘날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대생의 내면을 그대로 훑어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1년의 시기를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보내야 하다니, 나타샤는 그(안드레이 공작)를 사랑함으로써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을 느끼고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좌절한다.

 안드레이 공작은 물리적으로도 먼 거리에 있었고 물리적인 거리는 마치 심리적인 거리처럼 멀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타샤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말라간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나타난 잘생기고 치명적인 아나톨 쿠라긴이 접근한다. 아나톨에게 나타샤는 속절없이 매혹된다. 막장 드라마처럼, 끊어낼 수 없는 중독처럼 주변인들의 갈등과 치열한 나타샤의 내적 갈등은 너무나 잘 짜여 있고 읽는 이를 빠져들게 했다. 잠시 책을 덮고 이 철없는 아가씨에 대한 애도하는 마음을 품어보기도 하며 나는 계속해서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4권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총체와 그들의 삶 속에서 묻고 있는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에 얽혀 있는 사회적인 배경 등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 밖에 피예르의 삶, 마리야, 니콜라이 로스토프와 소냐, 바실리 공작과 베주호프 백작, 보리스와 드루베츠카야 부인 등 여러 가문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펼쳐졌다. 그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프랑스의 사령관 나폴레옹, 프랑스 군인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평민들의 생각과 입장까지 반영되었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이 그 이야기 속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와 살아가는 시대가 다르고 공간적인 위치마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유사한 상황 속에서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들이 보편적인 인류 공통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1부에서는 지난한 갈등 속에서 그들이 내린 결정 이후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강렬하고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했던 것들이 잔잔하게 가라앉아 분명한 삶의 형태로 안정적으로 자리잡혀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10년 후의 일상을 보는 것처럼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다시 에필로그 2부가 되니 이 이야기를 통해 톨스토이가 실험하고자 했던 명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끄는 물음들이 이어졌다.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이 작품의 차별적인 완전함과 톨스토이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톨스토이가 묻고자 했던 물음에 대한 나만의 결론은 아직 형성되지 못했음을 느꼈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고 각각의 인물들의 생각을 따라가며 행간 속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찾아보아야겠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다른 문학 작품을 읽어보면서 다른 작가들은 톨스토이의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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