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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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속삭임이 사랑인 줄 알았다. 짧은 기간 머무르면서 나를 흥밋거리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처음부터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수치가 되어 창녀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소박한 부엌에서의 자리를 지켰을 수 있었다. 그의 연락처도 없이 그가 떠났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펠리시아는 공황에 빠졌다. 그녀는 증조할머니의 돈 일부를 털어 조니를 찾아 낯선 세계를 헤매는 것을 선택한다.


 거듭되는 불경기로 사람들의 일자리는 쉽게 사라졌다. 조니가 다니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잔디깎이 공장을 수소문하지만 들르는 곳마다 공장이 폐쇄되었거나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조니의 아이를 임신한 채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의 사람들 속에서 펠리시아는 황망해한다.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로 떠도는 외국인 여자아이. 펠리시아는 힐디치가 남몰래 바라는 욕망을 충족시킬 도구였다. 젊은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매력적인 존재로 비쳐지기를 갈망하는 힐디치는 펠리시아의 연약한 처지를 이용해 도움을 주는 척하며 그녀와 함께 있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조니의 아이를 지운 죄책감에 고뇌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그녀 곁을 지킨 사람은 학대받은 적 있는 살인마였다. 힐디치의 진실을 깨달은 펠리시아는 간신히 탈출해 떠돌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이 겪은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아이를 지운 자신의 죄는 살인마로부터 도망친 것으로 상쇄되었다 느끼며 흘러갈 뿐인 현재에 스스로를 맡긴다.


 조니와 힐디치에게 펠리시아는 수단이었다. 타인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도구로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유희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으스댈 건수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자신의 부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행동은 잘못임을 아는 사람이 적다.

 

 펠리시아가 부당한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세상물정이었을까. 그녀는 순진했기 때문에, 어리석어서 이용당한 것일까? 나는 관계 맺기에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펠리시아는 어리석었다기 보다는 용감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조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믿었고, 불안한 상황에도 희망을 가졌다. 낯선 곳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그녀가 추구했던 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비록 그녀가 겪어야 했던 결과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얽매이는 것보다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거듭된 상실 속 단단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도 따스한 햇살 속에서 그녀만의 안온한 시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조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마치 뜻을 좇는 구도자처럼 고통을 극복하면서 삶을 잔잔하게 곱씹는다.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느끼고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면서 계속 나아간다.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실패한 지워진 삶. 어느 순간엔가 헛헛함과 원망이 한가득 흘러들어올 때 펠리시아는 다시 극복할 수 있을까. 조니, 그리고 힐디치를 겪으며 이전의 펠리시아는 사라진 것이 속상했다. 또 우리 사회에도 펠리시아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여자아이들이 많다. SNS로 연락해 현혹하고 기프티콘, 현금으로 취약한 아이들의 성을 사려 들거나 신체 사진 일부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약한 처벌을 받거나 아예 처벌받지 않기도 한다.


 타인에 대해 공감할 감수성이 부족하다면 문학작품으로나마 이해의 폭을 늘려야 하지 않을까. 이기적인 착취가 한 명의 개인적인 삶과 영혼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가늠하고 스스로 행동을 단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니와 힐디치처럼 취약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멈출 수 없을 것이며 언젠가는 잘못이 드러나 공동체로부터 배격되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품고 있는 깊이를 헤아리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되짚어 읽고 인물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잡생각이 들게 하면서 나를 옭아매는 사소한 갈등과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담담하게 흘려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파문을 그리다 잔잔해지는 물결처럼 여운이 남았다.




적의를 품은 어머니가 막아주리라는 영악한 계산속에 연락할 방법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 이 막돼먹은 녀석에게 속아 그녀가 겪어야 한 일을 생각하면 경악스럽다. 힐디치 씨는 함께 카페에 앉아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시도 때도 없이 흐르던 그 눈물을, 어느 공장에서 또 다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녀가 겪은 괴로움을, 그리고 뱃속의 아기를 지울 때 그녀가 느끼던 죄책감을 기억한다. - P265

밤이면 도시에 잔광이 어린다.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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